9월27일부터 시작된 ‘세계 효 문화 축제’가 한창이다. 불효자 공포 체험관에서부터 효 영상관, 효 인형극 등 볼거리, 체험거리들이 수원청소년문화센터와 화성행궁, 융건릉 일원에서 펼쳐지고 있다.

처음에는 ‘효 문화 축제’라니 도자기축제, 연극축제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그것도 과거의 것으로 어쩌면 진부하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효’를 축제의 모토로 삼았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러나 효 축제의 주제는 ‘세대간의 만남과 이해’이고, 이를 통해 효 정립에 대한 대중화, 현대화, 세계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핵가족화,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미담 중 하나가 부모를 위하여 장기일부를 이식해준 자식들의 이야기다. 어느 아들은 ‘아버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저의 간 ‘전부’를 드리더라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간 ‘전부’를 드리면 물론 드리는 쪽은 죽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아깝지 않다고 한 것은 내가 살아있는 것은 모두 부모 덕이기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 아버지의 밀린 일을 돕기 위하여 공휴일에 아버지를 따라 일을 하러갔다가 안타깝게 공사장에서 사고로 숨진 고등학생의 이야기도 들었다. 너무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반면, 신용카드 빚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가 부모를 협박하여 몇 차례 돈을 대신 갚게 한 뒤 그것도 모자라 더 이상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참히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의 이야기도 뉴스를 통해서 접했다. 해마다 제주도 등 여행지에 혼자 버려지는 노인들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장자 혼자서 상속을 받기도 하고, 호주승계를 받는 자가 다른 상속인들에 비하여 가산하여 상속을 받는 시대도 있었지만 요즘은 기혼 미혼을 묻지 않고 딸, 아들에 상관없이 자식들의 상속분이 같은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장남이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많이 퇴색해졌고, 모시는 쪽은 다른 형제들에게도 그 부양책임이 있다고 소송을 하기도 하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신 공로를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하기도 한다.

물론 민법상 소송으로 다툴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어쩐지 ‘효’라는 인간적인 도리를 법과 소송을 통해 해결하여야 한다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러나 앞으로 노령사회가 되어 점점 부양해야할 노인은 많은 반면 출산율감소, 청년실업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어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경우 벌금이라도 내야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 사친장에서 ‘세월은 물과 같이 흘러 부모를 섬기는 시간은 결코 길지 못하다. 그런 때문에 사람의 자식된 자는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면서도 자기가 할 일을 다하지 못할 까 두려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지금은 힘드니까 생활이 조금 더 나아지면 부모님께 용돈 드려야지’ ‘내일 전화 드리지 뭐. 아마 지금쯤 주무실 거야’라고 말하며 귀찮은 일을 뒤로 미루듯 부모 섬기는 일도 미루고 있다. 율곡 이이의 말처럼 부모를 섬기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그리고 세월은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불효자임을 깨닫고 정신차렸을 때, 부모는 이 세상에 안 계실지도 모르고, 병에 걸려 자식을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

‘효’란 간을 전부 드릴만큼 거창한 것이 아니다. 부부싸움 하지 않고 평안히 잘 사는 것도 효요, 1만~2만원이라도 형편대로 맞게 드리는 것도 효요, 뜬금 없이 전화하여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효다./장미애(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