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오스카상 시상식 때,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를 맹공격하던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미국이 세계에 한 짓들에 대해 '반성하는 백인'도 있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그가 쓴 책명도 '멍청한 백인'이다. 그 책에는 1992년 LA폭동 때 미국 백인들이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잘 기술되어 있다.
 
LA 언덕에 사는 수천 명의 백인들이 피난을 갔다. 남은 치들은 총을 꺼내들었다. 바야흐로 인종전쟁이 시작되는 전초전 같았다. 이때 마이클 무어는 뉴욕에 있었다. 재미있는 일은 서부의 폭동과 엄청 떨어져 있던 백인 뉴욕커들도 모두 교외로 서둘러 도망쳤다는 사실이다. 뉴욕거주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내가 1시에 건물 밖에서 본 상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수천 수만의 백인들이 너도나도 기차, 버스 가리지 않고 잡아타고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이었다.”
 
마이클 무어는 그 모습을 공포에 절은 메뚜기들 같았다고 표현한다. LA폭동 때 현장에 없었지만,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그곳 한인들이 흑인들에게 거스름 돈을 줄 때 행여 그 검은 피부에 손이 닿을까봐 동전을 밀어 던졌다는 것이었다. 주류 백인들보다 한인들이 더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했던 것이다. 흑인들을 그렇게 경멸하고 차별하면 주류 백인들에게 더 점수를 딴다고 생각했을까.
 
잊혀질 만큼 세월이 흐른 LA폭동을 문득 꺼내 든 것은 최근 하이 패밀리라는 한 가정문화단체에서 벌인 '혼혈아 인권운동' 때문이다. 나는 그 단체의 주장을 들으면서 마치 LA폭동 때 느꼈던 부끄러움과 비슷한 부끄러움에 떨었다.
 
한국의 첫 혼혈인이 태어난 때는 1947년. 말할 것도 없이 전쟁 때문이었다. 이후 현재 혼혈 2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이 든 세대들은 “아직도 혼혈인들 있어?”하고 묻는다. 하지만 50여년간 사회의 냉대와 그늘 속에서 혼혈인들이 엄연히 우리 이웃으로 이 땅에 같이 살고 있다. 펄벅재단의 통계나 전국 96개 기지촌에 각각 3명씩만 있다고 해도 산출되는 숫자, 그리고 1996년 이후 부쩍 늘기 시작한 국제결혼 인구, 최근 4년 동안 국제결혼한 자녀들까지 합치면, 줄잡아 이 땅에 10만 내지 15만명의 혼혈인들이 같이 살고 있다는 통계가 보인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똑같은 '한국인'이건만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면 '튀기'라고 놀림 받으며 왕따를 당하고 군 입대, 결혼, 사회적 냉대, 구직의 어려움, 정부의 무관심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사회·제도적 차별에 부닥친다. 18세 이상 혼혈인들의 43.3%가 단순노동직에 종사하고 있으며 사무직에 있는 혼혈인은 단지 1.6%에 불과했고 미취업자들도 13.2%에 달했다. 이렇듯 국내 거주 혼혈인들의 3분의2 정도가 실업상태에 있거나 비정기적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보니 주거환경도 열악할 수 밖에 없다. 67%가 사글세방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한국가정의 5배에 가까운 수치다.
 
또다른 어려움은 교육문제다. 가정형편이 어렵고, 교육수준이 낮은 편부모 가정에서 성장하는 혼혈아동들은 공부할 시기를 놓쳐 뒤늦게 학교에 가거나 호적이 없어 아예 취학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중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혼혈인들이 62.5%에 이르는 것은 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이유이겠지만 남다른 외모로 소외를 당하는 등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명칭도 대단히 잘못 되었다. 나이 50이 넘어도 여전히 '혼혈아(混血兒)'다. 어리고 미숙한 '아(兒)'는 그들이 아니라 혼혈인을 차별하는 바로 '우리 사회'다. 그래서 이번에 혼혈인 인권운동을 벌인 목사는 말했다. “혼혈인, 그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라고.
 
인종주의는 몰상식적일 뿐 아니라, 반인간적인 폭력이며 시대착오적인 편견이다. 백의민족설을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혼혈인들을 마치 무슨 죄인인양 '더러운 인종'이라고 매도할 때, 나는 그런 덜 떨어진 백의민족의 무리에 속하기보다는 성숙한 다문화 사회에 속하고 싶다. /최성각(작가·풀꽃 평화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