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정치권에서 '제3의 길' 이니 '제3의 선택'이니 하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특히 최근 일부 정치인들간에 논의되고 있는 신당을 '제3당' '제3세력'이니 하면서 소위 '제3'을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차기 권력의 향배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 정치꾼들은 하나의 대안으로서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아닌 제3의 정당을 찾기 위해 이합집산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제 또 철새정치인들의 계절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본래 제3의 길이란 용어가 유행하게 된 것은 영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석학인 정치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가 쓴 '제3의 길(the third way)'이 1998년 출간되면서부터이다. 기든스의 제3의 길은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 21세기를 이끌 새로운 이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창출된 화두이다. 이는 서유럽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의 출범으로 전통적인 개념의 좌우이념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기든스의 제3의 길은 문자 그대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제3의 체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좌파와 우파의 부정이 아닌 장점을 모은 긍정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이론이 더욱 주목을 받게된 것은 기든스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의 브레인으로 일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블레어 총리는 노동당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정책을 가지고 집권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정강정책 변화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좌파와 우파를 넘는 새로운 가치로서 기든스의 제3의 길의 개념을 사회경제적 변화의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한국에서 제3의 길은 김대중 정부 집권 초기 정치권은 물론 사회지도급 인사들간의 대표적인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김 대통령이 이 책을 독파하였다고 출판사가 신문광고에서 선전하고 또한 DJ정권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인 한 사회학자에 의하여 한국에서 번역·출간됨으로써 한때 정치사회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대통령은 블레어 총리와 같이 한국사회의 변화를 제3의 길에서 찾고자 했을 수도 있다.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좌우를 뛰어 넘는 새로운 변화의 가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비록 정치사회적 환경은 다르나 일부 정치인들이 한국에서 이를 적용하려는 시도는 21세기의 새로운 가치 창조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에 의한 정책추구가 오히려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켰다고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등은 '제3의 길은 없다'라는 글을 통하여 비판하였지만 정치인의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노력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제3의 길'은 새로운 시대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비전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고 대권이라는 권력의 향배를 가름하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권력의 단맛을 즐기기 위한 정치꾼들에 의하여 정략적 이해관계에서 논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과 같이 신선하게 느껴지지 못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이 현존하는 기존 정당에 대하여 실망하고 있으며, 따라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신당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사실 최근 정치권에서 민생문제는 제쳐두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병역비리 의혹 등의 문제를 가지고 막가파식의 사활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정치상황을 보고 있으면 참신한 개혁적 신당이 제3의 길과 같은 대안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치인의 제3의 길 선택은 현존하는 부정부패, 신뢰 잃은 정치, 지역주의를 뛰어넘어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과 가치를 부여하는 이념과 정책을 가진 비전 있는 제3당의 건설인 것이다. 구태의연한 정치구도 속에서 지역주의, 금권정치, 권모술수에 의한 퇴색한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에 의한 제3의 길이나 제3당의 창당은 또 다른 정치불신만 양산할 뿐이다. 정체성과 소신 없이 철따라 권력의 단맛만을 추구하려는 정치인들의 제3의 길을 국민들은 원치 않는다.

대통령 선거때마다 연중행사처럼 전개되는 정치인들의 '제3의 길'이 과연 블레어 총리 같이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 집권까지하는 성공의 길이 될지 또는 권력의 단맛만을 쫓다 구태의연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국민의 지지를 잃어 퇴락하는 실패의 길이 될 것인지 관심있게 지켜보자. <김영래 (아주대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