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인한 3년간의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일단 가라앉은지 8개월이 지난 1954년 4월초, 꺼멓게 불에 그을린 서울 세종로 중앙청(구 국립중앙박물관)의 임시정문에 '인물추천함'이라고 쓰여진 나무상자가 걸려있어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당시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쟁의 상처를 회복시키는 전재(戰災)복구와 함께 굶주리는 국민들을 먹여살리는 식량대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종자도, 비료도 없고 식량의 대부분을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하던 것을 농업개발을 서둘러 점차로 식량의 대미의존도를 줄여가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유능하고 뛰어난 농업행정가를 발탁하는 일이었다.

고심하던 이 대통령은 문득 나라가 어려울때마다 임금이 초야에 은둔하던 인재들을 널리 구했던 고사를 떠올렸고 그렇게해서 인물추천함을 내건 것이다. 추천함을 내건뒤 매주말이면 경무대의 비서를 보내 직접 살피게 했는데 초기에는 인물추천 보다는 취직청탁서만 가득해 이 대통령을 실망케 했다.

그런데 20여일이 지난 어느날 이 대통령은 비서의 보고를 받고 무릎을 쳤고 당장 가서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비서들은 밤을 새워 차를 달려 전북 익산의 한 농가로 가서 50대 중반의 촌로(村老)를 찾아 함께 상경했다. 다음날 이 대통령은 경무대에서 촌로를 접견하고 “자네 유학을 다녀와서도 농촌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고 있다니 참 훌륭하네. 내일부터 농림장관직을 맡아 피폐해진 농촌을 살려주게”하며 촌로의 손을 잡았다.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란 촌로는 “각하 저에게 잘못이 있으면 벌을 내려주십시오”하며 사양했으나 대통령의 거듭된 권유를 얼떨결에 수락하고 말았다. 이렇게해서 건국이래 처음으로 추천함에 의해 국민의 직접추천 형식으로 탄생된 이가 당년 56세의 제9대 농림장관 윤건중씨다. 1898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일제때 독일 뮌헨대학을 마치고 귀국후 몇차례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한후 익산에서 조그만 농장을 경영했다. 당시만해도 외국 유학생 출신이 농사를 짓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해서 인근의 농민들이 추천했던 것이다.

하지만 윤 장관은 관료생활의 경험도 또 농업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어 무위무사(無爲無事)로 시간을 보냈고 탄탄한 농촌부흥정책을 고대했던 이 대통령은 기다리다 실망, 한달만에 슬그머니 해임했다. 씁쓸해한 이 대통령은 그뒤 '국민의 인물추천' '인물추천함' 얘기를 두번다시 꺼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지난 10일부터 온라인과 오프라인(국민참여센터)에서 국방장관을 제외한 18개 장관직후보에 대해 국민각계의 인사제안을 받고 있다. 정보통신시대, 디지털시대의 국민이 참여하는 장관직 인물추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깨끗하고 능력있는 숨은 인재를 찾는다는 이번 인사추천은 자천(自薦), 타천(他薦) 모두 가능하며 혹시나 무분별한 장난식 추천을 막기위해 추천인은 자신의 인적사항을 밝히고 1천~2천자 범위의 추천서를 첨부케 했다. 10일부터 5일간 추천상황을 보면 총 1천67건에 677명의 인물을 추천한 것으로 드러났고 25일 마감때까지는 총 1만여건에 수천명을 추천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접수된 피추천인들은 국민제안센터와 인수위분과위에서 1·2차 심사를 한뒤 장차 구성될 인사추천위에서 3차 검증을 거쳐 새총리 내정자에게 기초자료로 제출케 될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국민참여를 주축으로 한 인터넷 추천, 직접 추천에서 각분야의 유능한 인재들, 장관재목들을 제대로 고르게 된다면 참으로 획기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네티즌·국민들에 대한 포퓰리즘(인기주의)에 흐를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다음 장관은 나라의 한 분야를 책임지고 발전시켜야 할 철학, 식견, 전문지식, 폭넓은 인간관계, 도덕적인 몸가짐 등이 종합적으로 요구되는 자리로서 10~30년의 오랜 시간을 두고 교육과정, 사회 및 공직활동 등으로 평소 주위의 검증이 축적되어야 한다. 인수위 등이 3차례의 검증을 실시한다고 하지만 짧은 기간에 얼마만큼 정확하게 한 인물의 무게와 실력, 가치를 검사·평가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국민추천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에메랄드를 찾아내는 격으로 기막힌 인물을 고를 수 있는 반면에 겉과 한 면만을 보고 고를 수 있어 낭패를 볼 가능성도 적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모처럼 착수한 인물추천, 장관추천의 경우 어디까지나 국민 일각의 의견과 생각을 듣고 측정하는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장관은 한 시대의 국정의 한 분야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직위인만큼 그만둔 뒤에도 어느면에서 책임은 계속되는 것이다. <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