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지 꼭 5년이 된 날이다. 외견상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외환위기의 후유증이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고 하는 환란 책임은 당시의 집권세력과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층에 있었으나 그동안 책임져야 할 이들은 오히려 부를 더 축적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의 중산층은 몰락하고 영세서민들은 더 가난해져 빚을 지게 된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많은 서민들이 요즘 은행빚이다 카드빚이다 해서 가계부채로 허덕이고 있다. 물론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한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먹고 살기 위해서 빚을 얻었을 것이다. 한 통계는 우리 나라 가계의 금융부채가 환란후 186조원으로 증가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백웅기 상명대 교수는 최근 개최된 금융안정세미나에서 지난 6월말 현재 가계의 금융부채규모는 397조5천억원으로 외환위기가 시작된 97년말(211조2천억원)에 비해 88.2%(186조3천억원)가 증가했다면서 그 폭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지적해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는 많은 서민들의 모습을 수치로 나타냈다.

여기에 노동시장의 문제는 우리 서민들을 더 괴롭히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가 680만명의 비정규직과 500만명의 5인 미만 사업장근로자, 300만명의 영세자영업자들이 도시빈민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지난 99년을 정점으로 급증한 임시직 근로자들은 전체 임금 노동자의 52~53%를 차지해 정규직보다 많은 수준이다. 저임금과 노동의 불안정성에 시달리는 노동빈곤 계층까지 포함하면 1천4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우리가 겪었던 IMF 5년의 위기 상황이 메뚜기 직장인들을 양산했으며 언제라도 실업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불완전 고용상태의 근로자들만 만들어 냈다는 얘기이다.

반면에 IMF 그 5년의 세월은 상대적으로 큰 부자들을 양산해 냈다. 부동산 투기로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를 만들어내고 이를 위해 온갖 편법과 불법이 난무하고 부정까지 가세했다. 아파트 부지를 구입, 분양을 하면 며칠 사이에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돈을 벌고 땅을 사고 몇 달 지나면 2~3배가량 폭등,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무늬만 벤처기업을 주식시장에 등록시켜 수백억원씩을 거머쥔 사이비 기업인도 나왔다. 편법으로 농지에 몇 개의 창고만 지어 세를 놓으면 한달에 수천만원씩의 수입이 들어오는 알부자들도 부지기수이다. 이들은 이렇게 번 돈으로 흥청망청 과소비를 부추기며 투기를 조장해 서민들을 더 깊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국내경제가 이제 완전히 IMF체제에서 벗어났다고 공언한다. 성장률은 98년 마이너스 5.8에서 올해 6% 이상으로 추산되는 고성장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거의 바닥났던 외환보유고는 큰폭의 경상수지 흑자로 1천180억달러가 넘어 우리 나라는 세계 5위의 외환 보유국이 됐다. 정부의 발표처럼 겉으로는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후유증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극복은 단지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빈 공갈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IMF의 그림자는 우리 서민·중산층을 붕괴시키고 '20대 80사회'를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상층부 20%는 더욱 부자가 되었고 특권층으로 부상했으며 80%의 중산 서민층은 가난해졌고 급기야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이에 따른 빈곤의 세습·고착화는 과거 '희망의 빈곤'에서 '절망의 빈곤'으로 구조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해결책은 있을 것이다. 다음 달이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다.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런 모순된 사회의 역전현상은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 이번에야말로 진정 서민들의 가계와 노동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나와야 한다. 이래야만이 진정 외환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송인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