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동계올림픽 개최를 위해 온 군민이 모여 애쓰던 강원도 평창이라는 도시….
 
방송에서 그 평창이라는 도시의 외침이 들릴때마다 필자의 아버지는 40여년전 교사 장경천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코쟁이 아이들을 지도하고 가족같은 학부모들의 정을 떠올리며 어울렸던 첫 발령지의 마음이 되어 다시금 순수해 지신다 하셨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이제 며칠 후면 필자의 고향 김포 운양초등학교에서 청년시절의 순수함과 열정을 뒤로한 채 교장으로 명예롭게 퇴직을 맞게 되신다.
 
유난히 먹을 것이 없었던 그 때 먹기내기가 한창이었을 무렵, 깊은 산골 마을의 흥이 많은 젊은 교사는 그 긴 겨울밤 간간이 막걸리 내기 심판을 보며 맛나게 많이도 드셨다는 웃지못할 얘기도 해주셨고, 학습준비물이 부족하여 들로 산으로 개울로 아이들과 함께 뛰어다니고 강건너 개울가에서 한 겨울 찬물로 빨래하시는 어머니에게는 박봉의 힘겨운 신혼을 보내야 하는 미안한 마음에 안타까워하기도 하셨다.
 
귀한 외아들을 멀리 보내고 외롭게 고향에서 병마와 다투시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으로 2년여의 평창생활을 접고 근 38년을 고향 김포를 지키며 교직생활을 하셨다 하니 참으로 그 보낸 세월 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그나마 1남 2녀중 맏딸인 필자는 감사하게도 식품위생직으로 초등학교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역교육청에도 근무한 경험이 있어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를 이해하는데 좋은 계기가 되었지만 그래도 한 번은 근무하시는 모습이 보고 싶어 어머니와 함께 가을 운동회 하는 학교를 찾게 되었다.
 
어렵게 찾아간 학교에서의 상상속 아버지는 교무부장쯤 하시면서 지휘봉을 휘두르고 계시겠지 했건만 불혹을 넘기셨는데도 벽지학교의 막내교사이시라 지워진 운동장 선을 그으시며 종일 허리굽혀 엎드려만 계셔서 찾을 수가 없었던 기억도 있다.
 
사춘기때 초등학교 교사라는 아버지의 직업이 부끄럽고, 새벽마다 이슬을 뚫고 장화를 신고 출근하시는 아버지가 이상하기만 했는데 알고보니 도로가 포장이 안돼 지금은 폐교된 학교를 3년여 동안 경운기를 타고 출근하셨다 하니 얼마나 죄송스럽던지.
 
그때 곁에서 '가나다라'를 배우고 '1, 2, 3, 4'를 배우던 귀엽던 학생들이 어느덧 지역에서 큰 일꾼들로 자라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정겹게도 어울렸던 학부모들은 이제 같이 늙어가는 친구들이 되어 퇴직후에도 외롭지 않을 거라고 웃으시는 아버지.
 
어느날 퇴근후 어머니에게 '이젠 퇴직 후에 뭐하며 지내지' 하고 물으셨더니 어머니께서는 “그동안 가정과 직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으니까 이젠 저를 위해 사세요. 운동도 함께하고 시장에도 같이 가고 맛있는 것도 함께 먹으러 다니면서 말이죠.” 이렇게 답하셨다.
 
그간 아무일 없이 명예롭게 퇴직을 하시게 끔 도와준 많은 분들께 감사함을 전하고, 작년 봄 어려운 수술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교직을 마무리하시는 아버지께도 감사드리면서 이제 맏이로서 수고하신 아버지의 짐을 덜고 열심히 그리고 아름답게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2005년 2월 24일. 이 날은 이렇게 수고하고 감사드리고픈 이들이 모여 작은 축제를 여는 날이다. 설렁탕 한 그릇으로 마음을 다 전할 순 없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더불어 가고, 돌고 도는 바퀴처럼 또 다른 후배가 이어갈테지만 그 날의 축제를 상상하며 바라보는 겨울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높아보였다.  /장영미((주)대성주방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