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 이름은 '메종 드 반 고흐'였다. 마침 내가 제2외국어로 배우고 있는 것은 불어. 나의 제2외국어 실력으로 해석해 보자면 화실 이름은 '반 고흐의 집'인 셈이었다. 귀를 자른 미치광이 화가, 일생 동안 돈이라곤 벌어보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의지했던 화가, 죽어서 신화가 된 화가, 현재 그림값이 가장 비싼 화가. 작년에 미국에서 벌어진 미술품 경매에서 그의 그림이 8천250만달러에 낙찰됐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었다. 미술사상 최고가라고 했다.
반 고흐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건 그 정도였다. 그 정도밖에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반 고흐가 맘에 들지 않았다.
일생 동안 동생에게 빌붙어 살았다는 그 대목이 특히 거슬렸다. 고흐만 아니었다면 그의 동생도 그 못지 않게 훌륭한 화가가 되었을 수도 있고 훨씬 잘 먹고 잘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고흐의 동생은 아니지만 뭔가 억울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다. '반 고흐의 집'이라니, 정말 재수 없는 이름이다.
게다가 그곳에는 어떤 화실이든 반드시 붙어 있게 마련인 그것조차 없었다. 수강생을 유혹하고 화실 주인이 입에 풀칠하기 위한 최소한의 그것, '입시 전문'이라는 문구가 없었던 것이다. 잘난 척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더더구나 서울대를 조강지처로 모시고 사는 박진 같은 인간이 이런 데를 드나든다니 무조건 비위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실이 들어 있다고 해서 주변의 고만고만한 주상복합 건물과 크게 다른 건 아니었다. 여기저기 타일이 떨어져 나간 지저분한 외벽, 마모된 계단과 난간, 층과 층 사이의 공중 화장실에서 풍기는 악취. 아름다움과는 전혀 무관한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미를 창조하겠다는 것인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이름만 고상하고 속은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너무나도 '박진스러운' 화실. 웃기는 자장, 짬뽕, 탕수육, 팔보채, 그리고 군만두여! 중국집에서 배달 나온 사람처럼 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포즈로 화실 문을 열어 젖혔다.
이젤을 겨우 네다섯 개밖에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화실이었다. 다 낡아빠진 침대 겸용 소파, 간이 개수대, 휴대용 버너, 80ℓ짜리 냉장고, 커피믹스와 라면, 코펠 따위가 놓여 있는 선반,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화구들. 화실의 살림살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특이하게도 아그리파니 줄리앙이니 하는 석고 모형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정말로 입시와는 아무 상관없는 화실인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것과도 전혀 상관없는 화실이었다. 단지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이 있을 뿐.
“그림 배우고 싶으면 살부터 빼라.”
내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어떤 남자가 그렇게 쏘아붙였다. 유일하게 혼자 이젤 앞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그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였다. 나를 직접 보지도 않고, 나의 이 늘씬한 몸매를 감상조차 못한 주제에 그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아, 진짜 재수 없는 화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참아야 했다. 휴대용 가스 버너에 코펠을 올려놓고 있던 소은성, 그녀와 드디어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2. 안전율 (2)
입력 2002-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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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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