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박정이냐?”
내가 진학상담실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 집게도라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집게도라 옆에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영어선생도 함께 앉아 있었다. 진학상담실에는 오직 그 두 사람뿐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봐.”
이번에는 영어선생이 말했다. 나는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집게도라의 책상 위에는 가정환경조사서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에 관한 기록이었다.
“네가 박진 동생이냐?”
가정환경조사서의 가족관계란에 적힌 형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집게도라가 말했다. '네가 박정이냐?'고 물었을 때보다 백만 배나 기분 나쁜 질문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넌 공부가 형만큼은 아닌가보다. 그러니까 내가 널 몰랐지.”
계속해서 이어진 집게도라의 말. 그럴 것이다. 당연히 나를 모를 것이다.
그의 집게가 나를 기억할지는 몰라도 그는 아닌 것이다. 그와 나는 한번도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 적이 없지만 그의 집게와 나의 제비초리는 수시로 만나서 물어뜯고 뜯기고…그랬으니까.
“아무튼 어느 집에나 저렇게 속썩이는 녀석이 반드시 있어. 집에만 있나? 각 학급마다 하나씩 또 있지. 이 학교에 들어온 이상 선택받은 자의 자존심이란 걸 지켜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요, 주임 선생님?”
영어선생이 지껄여댔다. 그의 안경은 김이 서린 듯 희뿌옇게 보였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그것은 김이 아니라 비듬이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재주는 별개라고들 하는데 그 말은 바로 비듬 낀 안경을 쓴 채 잘났다고 지껄여대는 저 영어선생을 위해 존재하는 듯싶었다. 그는 본토의 -여기서 말하는 본토란 당연히 USA를 가리킨다- 최신 영어 동향이나 그쪽의 흐름에 대해선 꿰차고 있었지만 가르치는 건 영 아니었다. 참고서를 줄줄 읽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했을 땐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자기가 작전 사령관이라도 되는 양 스커드미사일이 어쩌고 후세인이 저쩌고…북 치고 장구 치고…아주 난리였다. 그가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무렵 내가 보았던 어떤 영화에서 후세인은 예사로 정적의 목구멍에 권총을 박았으며 그들의 인육으로 회를 떠먹었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이라크 태생의 한 남자가 고등학교 하나를 점령한 채 인질극을 벌이던 영화도 있었다. 그 남자는 어렸을 때 미군에게 부모를 잃은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픈 기억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건 내가 생각했을 때 그랬다는 것이다. 영화에 묘사된 그 남자는 철저한 악의 화신일 뿐이었다.
영어선생은 본토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굴었지만 사실 다 믿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직접 USA에서 살아본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수업을 경청했던 것은 그가 바로 은성의, 은성의 담임이기 때문이었다.
정직한 구조의 딜레마 (15)
입력 2002-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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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1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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