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규 직원실 벽시계가 다섯시를 알리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쪽으로 가는데, 초겨울 짧은 해가 벌써 기울어져 주위가 어둑해졌다.

기온이 내려 뺨에 와 닫는 공기가 매우 찼다. 그는 교문을 빠져 나오면서 다시 손목시계를 보았다. 분침이 1자를 막 지나고 있었다.
 
그는 교문 앞에서 잠시 좌우를 돌아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행동대원들이 고려 호텔에 연금되어 있는 조만식 장로를 구출하고 정각 일곱 시에는 장대현 교회로 오기로 되어 있다. 치안대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들이닥치기 전에 조 장로가 교인들 앞에 나서기만 하면 일은 성사된다. 지금부터 7시까지는 두 시간 가까이 남았다.
 
6시까지 조 장로 구출 여부가 알려질 것이다. 현승규 도경빈 두 목사도 조 장로가 연금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담임하고 있는 교회 청년 학생들을 데리고 장대현 교회로 모이기로 되어 있다. 교회에서 잠시 예배를 드린 후에 조 장로를 앞세워 시가 행진을 하면서 반 김일성 성토 대회를 열기로 되어 있다.
 
학생 동원은 평양중학 역사교사 원철규가 맡았고, 조 장로 구출 행동대원은 평양 기독교 청년면려회원들이, 연락은 장대현 교회 학생 면려회원들 중에 원 선생이 믿는 평중 4·5학년 생들이 맡았다. 사태의 상황을 곧 평양 제2교회 현승규 목사, 중앙교회 도경빈 목사에게 전하도록 되어 있다. 두 목사가 시무하는 각 교회에서는 이미 청년 학생들이 기도회로 모여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철규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지난 3월에도 장대현 교회 교인들이 시위를 벌린 일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공산당 세력들이 조직화되지 않았었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경우에 민심이 동요될 것을 우려해서 공산당 측에서도 유화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 후에 기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고, 소련의 도움으로 김일성 체제가 거의 굳혀지고 있는 상황이라, 김일성 친위 보안대가 시위 사태를 무리하게 진압할 것이다. 그래서 희생자가 많을 수도 있다. 조 장로를 볼모로 협상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연금 상태인 조 장로를 구출할 수 없다면 일은 어렵게 된다.
 
철규는 교회 앞 골목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연락 학생과 만나기로 되었다. 중국 식당 산동루는 평소 교회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였고, 그 주인도 교인이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가 막 산동루로 들어서는데,

“원 선생님!”

 
등뒤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철규가 뒤돌아서는데, 저편 골목에서 평중 교복을 입은 학생이 그에게 달려왔다.
 
“선생님….”

학생은 숨을 가쁘게 쉬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걱정은 했지만, 막상 실패했다는 사실을 들으니 생각이 콱 막혔다. 호텔 지배인이 교인이어서, 식사시간 전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조 장로를 호텔 밖으로 모시고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오후부터 감시가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아마 저편으로 정보를 알아차렸나 봅니다. 우선 두 분 목사님과 선생님은 잠시 피해 있으라고 합니다.”

학생은 좌우를 살피면서 빠르게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