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규는 이곳 저곳에 널려 있는 책이 들어있는 사과 상자를 복도로 옮겨놓는데, 황덕재 장로가 찾아왔다.
 
“아니, 목사님, 이거 무슨 일이십니까?”
 
황 장로는 땀을 흘리면서 무거운 책 상자를 옮겨놓는 승규를 보더니 안색이 변하였다.
 
“목사님, 이러시면 우리 장로들이 교인들에게 욕먹습니다. 아니, 이런 일을 목사님이 하셔야 합니까? 책을 정리하신다고 말씀만 하시면 저희가 해놓을 텐데요.”
 
황 장로는 그 동안 현 목사가 소박하고 되도록 남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미를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목사님, 이러시면 남들 보기에 교회가 목사님에게 뭔가 크게 섭섭하게 해 드린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승규는 황 장로가 정색하고 말하는 바람에 오히려 무안했다.
 
“장로님, 오해하시지 마십시오. 제가 쓰던 물건들을 제 손으로 정리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 동안 마구 쌓아놓기만 했는데, 정리하면서 쓸모없는 것은 치워버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럴려면 제 손으로 해야 합니다.”
승규는 간곡하게 설명했다.
 
“그래도 사람을 데려다가 시키시면 되지요. 이렇게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제처럼 저희를 돌봐주시던 목사님이 떠난다고 교인들이 얼마나 섭섭해 하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이북에서 피란 와서 길에서 헤맬 때에 목사님께서 우리를 모아 주님께 예배의 단을 쌓고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인도해 주셨는데….”
 
황 장로는 말을 하면서 목이 메었고,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승규와 황 장로가 만난 것도 20년이 넘는다. 1·4후퇴 때에 혼자 월남한 그는 주일날 마다 교회 앞에서 군고구마를 팔았다. 당시 교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물건을 사지도 팔지도 말라는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러기에 장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겨우 어린 아이들 호주머니나 노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주일 날 밤이었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이 거의 집으로 돌아간 후에, 현 목사는 사택으로 가려고 교회를 나섰다. 그런데, 교회 앞에 군고구마 장수가 방한모를 눌러쓰고 앉아 있었다. 무심히 지나치던 현 목사는 되돌아섰다. 드럼통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는데, 아직은 사그라지지 않은 불잉걸이 약간 보였고, 그 위의 철판에는 구운 고구마들이 여러 개 있었다.
 
“많이 파셨소.”
 
사내는 현 목사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획 돌렸다.
 
“예수쟁이들은 일요일에는 먹지도 않는 답디까?”
 
청년은 도전적으로 그를 야유했다.
 
“남은 거 모두 주시요.”
 
승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은 것을 다 사버렸다. 그 후 주일 저녁 집으로 돌아갈 때 마다 남아 있는 군고구마는 현 목사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