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규는 의외였다. 홍 권사는 안정된 집안의 주부이면서 교회 일에 열심히 참여하는 신실한 교인이면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권사이다. 집사인 남편은 국책 회사의 중견 간부이고, 자녀들도 다 명문 대학을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는 단란한 집안의 어머니이다.
“일어나세요. 제게 잘못한 일이 아닙니다. 다 주님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그 일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제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승규는 진심으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 목사님을 곤경에 빠트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다급한 나머지 그런 일이 큰 파장을 몰고 올 줄 전혀 몰랐습니다.”
홍권사의 둘째 아들이 시국사범으로 구속되었다. 우선 아들도 문제이지만, 남편이 문제였다. 아들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남편이 직장에 붙어있을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백방으로 수소문 했으나 아들 일은 해결될 가망이 아득했다. 반공법 위반에다가 유신을 비난하는 청년 모임에 참여했으니, 소위 시국사범이었다.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기도해도 일이 풀리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아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으나,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교회 주보에 현 목사가 미국으로 집회 인도 차 출국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주일 화요일이었다. 남편 직장으로 웬 사내가 찾아와서는 직접 거래를 하자고 제안했다.
“저는 현 목사님에게 큰 신세를 진 처지라서 뭘 꼭 갚아야 하는데, 목사님이 전혀 받아주지 않거든요. 그런데 마침 목사님이 미국으로 출타하신다니까, 제가 달러를 좀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을 전하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어요. 목사님께서 미숫가루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미숫가루 병 안에 이 달러를 넣고 공항에서 목사님 몰래 그 따님에게주면 되겠지요. 일이 성사되면 제가 댁의 아드님을 책임지겠습니다. 저는 기관원입니다. 제가 그 사건 조사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실무자입니다. 그런데 부장님, 이런 이야기는 들으시고 곧 잊어버리십시오. 기억하고 있으면 누구든지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그렇게 약속을 하였다. 그 일을 홍 권사가 감당한 것이다.
“저는 사실 그 사람 말을 믿었어요. 더구나 아들을 잘 되게 해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미련한 짓을 저질렀지요. 그 때 일이 커지면서 목사님께 사실을 다 말하려고 했습니다만 아들이 풀려나지 않았고, 저로서는 도저히 용기가 없어, 한 동안 다른 교회에 나가기도 했습니다만, 주님께는 모든 것을 고백했더니, 목사님을 만나 다 일러바치라고 그러더군요. 저도 다 말해 버려야 편안할 것 같아서요….”
홍 권사는 울면서 말하는데, 도리어 승규가 미안했다.
“저는 권사님 덕분에 이렇게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권사님, 그 일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오히려 그 일 때문에 더 큰 은혜를 받고 이렇게 새로 태어났습니다. 결코 제게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 말에 홍 권사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저는 유영에게 미안하고, 따님의 그 의연한 모습에 더욱 제가 작아졌습니다. 따님은 제가 미숫가루를 넣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승규는 유영이가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다물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빈 하늘 아래 서다(47)
입력 200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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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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