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규는 도 목사의 활동 상황을 성 의원으로부터 들으면서 마치 캄캄한 수렁으로 가라앉는 듯해서 눈앞이 캄캄했다. 차라리 북한 사회에서 정치범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부담이 덜 되었을 것이다.


“나가시지 않은 것이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도 목사에 대해 설명하던 성 의원이 승규를 쳐다보면서 은근히 말했다.

“무슨 말인데요?”

“유럽쪽은 더 위험하기도 하고, 이런 말을 성 권사에게는 하지 마십시오, 도 목사는 주로 동독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목회자를 가장한 첩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좋게 말하면 외교 활동이긴 하지만.…”

승규는 도 목사가 첩보 활동을 관장하는 것으로 들렸다. 성 의원은 제3 통로를 통해서 그 동안 도경빈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다. 그가 정보부처에서 일할 때 까지 도경빈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그의 모습이 공공연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철규는 지금 어떤 지위에 있나요?”

승규는 그가 궁금했다.

“김일성 사상을 구축하는 이론가입니다. 한때는 김일성 대학 조선사회연구소 책임교수였는데, 작년부터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승규는 원철규 일도 마음에 걸렸다. 도 목사를 그곳에 묶어놓은 것은 전적으로 원철규였다.

“열렬하게 김일성 타도에 앞장섰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끔직하네요.”

승규는 만약 자기가 도 목사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월남한 처지에 원철규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 뜰에서 죽을 수 있었을까? 원철규의 회유에 순응해서 김일성 환영대회에 참석하고, 다시 북쪽으로 넘어가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상의 선택은 대부분 상황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 역사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강요해 왔지 않아요?”

성 의원은 승규의 착잡한 마음을 알고는 위로하는 투로 말했다.
“상황 논리에 자신을 맞겨버린다면, 진리는 무엇이고, 믿음은 무엇입니까?”

백 변호사가 다소 불만스러운 투로 성 의원을 쳐다보았다. 여당 실세인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는 것으로 들렸다.

“그 가치 기준은 대부분 인간들에 의해 도색된 경우가 많기에 애매할 뿐이지요. 우리처럼 도덕적인 가치를 앞세워 살아왔던 처지에는 대부분 명분 앞에는 약해집니다. 그것이 지식인의 약점이기도 하고, 회유하려는 자들은 회유의 대상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치를 내세우거든요. 아마 원철규도 틀림없이 도 목사님을 회유하면서 하나님을 내세웠을 겁니다. 원철규 그 사람이 역사선생 아니었습니까?”

승규는 성 의원의 말을 조금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조선기독교연맹을 이끌어가고 있는 도목사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성 권사님에게는 여행을 단념하시도록 말씀하세요. 유럽 여행은 조심해야 하고, 더구나 도 목사의 신상이 밝혀진 이상, 갈 필요가 없겠지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승규도 마음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