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부친과 나는 죽마고우였어. 같은 고향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광주로 유학을 와서 중학교까지 같이 다녔으니까….”
심 교수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봄이 무르익은 정원에서 선명하게 그 무덥던 여름 한철이 되살아났다.
북쪽 군대가 서울에 진입하고 한 주일이 지나도록 그의 주변은 조용했다. 심 교수는 집밖 출입을 하지 않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면서 모시잠방이에 적삼 바람으로 발을 쳐놓은 안방에서 지루한 초여름 긴 낮을 보내고 있었다. 지주의 아들이고, 교회 장로이고, 학교 일 때문에 미군정 당국과 자주 접해온 그는 북쪽 세상이 되었으니 응당 숙청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옥 대문을 잠가 놓고, 무슨 기미만 있으면 광 마루 밑에 파놓은 지하실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방이 된 이듬해 매입해서 이사한 이 집에는 안채와 사랑채 안에는 사람이 은신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몇 개 있었다.
세상이 달라졌는데도 집은 조용했다. 그는 조혼한 탓에 벌써 일곱 살과 다섯 살 된 두 아들과 돌이 지난 딸아이 아버지였다. 사랑채에는 집 안팎을 돌보도록 고향 어른이 올려 보낸 근실한 심씨네 내외가 살고 있다. 그들은 나이는 심교수보다 많았으나 항렬로는 그의 조카 뻘이었다. 고향 집에서 집사처럼 집안 일을 도맡아 왔던 내외였다.
심 교수가 집 대문 간 옆에 붙어 있는 변소에서 나오는데, 청년 둘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심 서방이 옆 집 담배 가게에 가면서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뒤이어 들어온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누구를 찾으시오?”
변소에서 나오던 심 교수는 학생 투의 청년들을 보면서 기개를 죽이지 않고 물었다. 혹시 그의 학교 학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참, 심 교수님, 절 모르시겠습니까?”
두 사람 중에 얼굴이 파리한 청년이 허리를 굽히고 그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심 교수는 얼굴이 낯설었다.
“모르시겠죠? 저는 Y대학 상과에 적은 두었지만 그 동안 학교를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는데, 지난봄에 그만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순간 심 교수는 학내 좌익계 학생 지도자인 갈규현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출석부에는 이름이 있는데, 강의시간에 만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조교에게 물었더니 웃기만 했다.
“그런가? 들어오시지.”
심 교수는 집안으로 두어 발자국 떼어놓으면서 인사말로 한마디했다.
“감사합니다.”
갈군은 같이 온 학생을 쳐다보면서 눈짓했다.
“심 교수님, 심교수님 같이 고명하신 분이 이렇게 댁에만 계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말입니다.”
집안을 기웃거리던 키가 짝달막하고 다부지게 생긴 청년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면서 말했다. 그 바람에 심 교수는 어리둥절했다.
“차차 하시겠지. 참 몸이 좀 불편하셨죠? 이렇게 집이 넓은데 방을 몇 개 쓰면 안 될까요?”
그제야 심 교수는 이들이 자기를 야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버릴 수 없는 유산(28)
입력 2003-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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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0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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