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후에 창은 진한 커피를 마셨고, 경빈은 시거 연기만 날렸다. 연기 속에 시간이 뒷걸음질치면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앞에 앉은 중년의 선우창이 그에게는 10대의 피끓는 소년이었다. 남반부에서 유학온 40대의 전기공학도가 공산당원을 때려잡겠다고 서울 퇴계로에 있는 서청 서울지부 사무실을 드나들던 과묵한 청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저는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었다는 가두 방송을 듣는 순간 온 몸을 돌던 피가 갑자기 멈추는 듯하더니 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대학 안에서 은밀히 활동하던 좌익 세포들이 날뛰는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나설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되자 월요일 아침에 학교로 가다가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로 달려가 지원 입대했습니다. 아마 그 때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영락없이 그들 손에 죽었거나 인민군에 강제 입대해야 했을 겁니다.”
창은 시거 연기를 날리는 경빈의 눈 앞에 어리고 있을 그의 과거를 먼저 말했다.
“선견지명인가?”
경빈은 전쟁이 일어난 이후 북쪽 군대가 서울에 진주한 후에 한번도 창을 만나지 못했다. 만약 서울에 남아 있었더라면 교회로 한번쯤은 찾아왔었을 그였다.
“일종의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대학 내에서 우익학생의 선봉장이 아니었습니까? 서청 사무실에서 잔 일을 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서청 단원으로 대학의 좌익 세포와 싸우는데 앞장을 섰었지 않습니까.”
“그렇지.”
경빈도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를 용기있는 청년으로 생각했다. 주님의 뜻을 이어받아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 믿음의 청년이라고 한 때는 그를 무척 신뢰했다.
그는 매우 부지런했다. 평양을 떠나올 때 가져왔던 패물을 팔아 장사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밤이면 양담배와 미군들이 쓰던 자잘한 일용품들을 모판에 놓고 명동 거리에서 장사를 했다. 서청 단원들이 도와주워서 장사도 잘 되어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면서 대학 내 좌익의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좌익 학생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무력으로 싸우기도 했다. 그 때만 해도 선우창은 도경빈에게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주님의 일꾼이었다.
“세상은 참 좁던데요. 제가 전쟁 직후 입대해서 후퇴하는 미군을 따라 대구까지 내려갔습니다. 정식 교육 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군인이 아니라, 군속이었지요. 제 선배 한 사람이 육사를 졸업한 중위로서 군단 방첩대에 근무하는 정보장교였습니다. 저도 그 부대에서 군속처럼 근무하면서 자잘한 일을 맡았습니다. 주로 미군부대에서 넘겨온 영문 첩보 자료를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후에 정식 입대처리가 되어서 휴전 때까지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창은 그곳에서 만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 한 학년 위인데, 문리대 좌익 학생의 총책이었다. 부대가 북진하여 철원에 있는 국민학교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였다. 연대에서 잡은 포로 중에 거물 급으로 분류한 7명이 사단을 거쳐 군단 방첩대로 왔는데, 그 중에 국대안 반대 문리대 학생책임자였던 최찬영을 만났다. 그는 겁에 질려 초췌한 모습이었는데, 창을 보더니 외면하였다.
말과 칼(11)
입력 2003-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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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3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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