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가 월드컵 본선무대 첫 승과 16강 진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열
린 이탈리아와의 16강전.

한국이 우승후보 이탈리아에 패하더라도 전세계 언론은 한국이 선전했다고
보도하겠지만 한밭벌을 가득 메운 붉은 물결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취골까지 내줬지만 목이 터져라 선수들의 이름을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
다.

그러나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전국 각 도시의 주요 거
리를 점령하고 앉은 거리 응원꾼들의 희망도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제 2분만 지나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패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었다.

이탈리아의 빗장수비에 막힌 볼이 미드필드로 흘러나오자 박지성이 몇 발
짝 드리블하고 들어가다 페널티지역 오른쪽에 있는 황선홍에게 패스했다.

황선홍은 골문을 등진채 왼발 인사이드로 패스했고 상대수비수의 몸을 맞
은 공을 설기현이 왼발슛, 그렇게 견고하게 버텼던 상대 골문을 마침내 열
어 젖혔다.

이어 한국은 연장전에서 안정환의 골든골로 이탈리아마저 꺾고 8강에 올랐
다.

후반 종료 2분을 남기고 극적으로 터진 설기현의 동점골은 사실 행운이 따
랐다.

회전이 많이 먹었던 볼이 상대 수비의 허벅지와 손을 맞은 뒤 달려들던 설
기현의 왼발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던 것.

그러나 행운으로만 돌릴 수 없는 요소가 있었다. 경기종료 직전까지도 볼
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근성이 없었더라면 동점골
은 불가능했다.

히딩크 감독이 번번이 기회를 놓친 설기현을 계속 투입한 것도 이 때문이었
다.

사실 설기현은 이번 대회에서 국민들의 속을 어지간히 태웠다.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1차전부터 시작해 거의 완벽한 기회를 놓치기를 여러
차례.

이 때문에 한국은 쉽게 풀어 나갈 수 있는 경기를 어렵게 할 수 밖에 없었
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설기현의 플레이에 매번 만족감을 표시했다.

골을 넣지는 못하더라도 폭넓은 행동반경으로 상대수비 라인을 휘저어 놓았
고 이로 인해 다른 선수들이 득점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게 히딩크 감독의
설명이었다.

또 강철같은 체력을 앞세워 수비에도 재빨리 가담하는가 하면 집중 경계대
상을 견제하는데도 큰 힘을 보태는 것도 이유였다.

설기현은 그렇게 골 감각이 뛰어난 선수는 아닌데다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는 이래저래 컨디션이 저조할 수 밖에 없는 일이 겹쳤다.

2년전 다친 허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소속팀인 벨기에 안더레흐트에서
도 규칙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탓에 감각도 떨어졌다.

그러나 뛰어난 체력과 넓은 활동반경을 자랑하는데다 몸싸움과 수비가담 능
력 또한 수준급이기 때문에 유럽의 강인한 수비수들을 상대할 필수조건들
을 갖췄다는 평가에 따라 최종 엔트리에 합류했다.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한 대기만성형인 설기현은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
언한 황선홍의 뒤를 이어 한국축구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해 줄 것이라는 기
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더 세밀한 플레이가 가능해져야 한다는 지적도 동시
에 받고 있다.

패스의 정교함도 가다듬어야 하며 골키퍼와 1대 1상황을 골로 연결할 수 있
는 골결정력도 높여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또 경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그라운드와 선수를 더 넓게 보는 시
야도 개발해야 한다.

이번 대회를 통해 가능성을 보여 준 설기현이 4년뒤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
컵에서는 훨씬 세련된 플레이로 한국의 돌풍을 이끌어 주기를 기대해 보
자.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