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극심한 허탈감과 새어머니에 대한 증오감으로 번뜩이는 눈빛을 하고 그녀를 죽일 듯 쏘아 보았다.
“그래요. 병원가서 진단서 끊어서 나를 고발하시오. 그러나 찬수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면, 당신은 이 집에서 나가야 해. 찬수를 저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은 바로 당신이니까….”
“뭐, 뭐…. 다, 당신이라구? 아니, 아니….”
“오는 말에 대한 답례요. 어미라면 아들 고발하겠다고 경찰서에 전화하고 진단서 끊겠다는 소리는 안할테니까. 그것은 원수끼리나 하는 소리니까.”
나는 씹어 뱉듯이 말하곤 축 늘어진 아버지를 번쩍 안아다 방에 눕혔다. 그리고 설탕물을 만들어 반컵 정도 마시게 했다.
“찬우야…. 그,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느냐….”
아버지가 천장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딘가에 혼이 빼앗겨버린 사람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그럼요,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아버지, 마음 굳게 잡수세요. 사실인 것 같아요. 내일 학교 보내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를 들어보고 방법을 강구해 보자구요….”
시간은 이미 새벽으로 넘어서 있었다. 아버지는 계속 잠을 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한숨만 내쉬면서 몸을 뒤챘다.
나는 아버지 옆에 쭈그리고 앉은 채 양 무릎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피로가 전신을 엄습하여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찬수에 대한 회한으로 가슴과 머리가 뻐개질 듯 했다. 새어머니의 넘치는 보호아래 공부하는 아이, 철 안든 왕자쯤으로 더러는 부러워하고 선망도 하면서 무관심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하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새어머니가 찬수에게 근접을 못하도록 갖은 언사를 구사했다손 치더라도, 그러나 아버지의 피를 나눈 형제였거늘, 내가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한 것이었다.
“찬우야…. 이 일을 어찌하믄 좋단 말이냐, 대학은 나와야 사람 구실을 할 것 아니더냐….”
아버지의 숨소리가 고른 듯해서 잠 속으로 드시는가 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면 됩니다. 무리하게 강조하고 고집하면 시간과 돈만 소비하고, 사람은 더 못쓰게 될 수도 있어요. 이제 그만 주무세요. 찬수 술깨고 나면 다시 얘기를 들어보고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그래… 너도 가서 자거라….”
나는 안방을 나와 작은방으로 갔다.
새어머니는 코를 골고 자는 찬수를 끌어 안고 누워 있었다.
“안방으로 가서 주무세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간다. 네놈이 찬수를 깨워 무슨 닦달을 할지도 모르는데. 멀쩡하게 제 공부 잘 하는 아이에게, 술마셔 헷갈린 상태를 이용해서, 또 악랄하게 굴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찬수 옆을 떠나.”
나는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이제는 대구할 기운조차 없어 헛웃음만 흘리고 담요 한 장만 들고 마루로 나왔다. 마룻바닥에 흩어진 맥주병이며 통닭 토막들을 정리하고 대충 걸레질을 한 후, 담요로 몸을 휘감고 누워버렸다.
생명의 늪(26)
입력 2004-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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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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