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새롭게 시작하는 내 앞날의 목전에 이런 일이 터져 맘을 편치 못하도록 만드는가 싶어 야속스러웠다.
6개월의 견습기간 동안 일을 배운다고는 하지만 의학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데다 학창 시절 학보사 기자 노릇 조차도 해보지 못한 나는, 읽어 두어야할 서적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나는 만사를 제치고 중앙 도서관으로 갔다. 이런저런 관계서적을 뽑아 읽어보면서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하루를 할애했다.
저물녘, 귀가하는 길에 목욕도 하고 이발도 했다. 색깔이 밝은 와이셔츠와 넥타이도 샀다.
마침 연희누나도 전화를 주었다. 첫 출근하는 날 아침은 자기 차로 함께 가자고 했다. 그녀 시간에 피해가 되지 않으면 나는 무한한 영광이라고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기분이 밝아졌다. 누나의 전화는 나를 활기차게 했다. 영약이라는 산삼을 먹으면 이토록 금방 힘이 솟구칠까 싶을 정도로 몸의 기운이 충천해졌다. 비로소 나를 찾은 가뿐하고 뿌듯한 마음이었다.
그간 알게 된 새어머니의 내력과 그녀의 황당한 언행과 찬수의 속임수와 가출로 심하게 분노하고 침체된 머릿속이 신기하게 투명하도록 개운해졌던 것이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기로 했다.
나는 조금은 들뜨고 흥분된 기분으로 귀가했다. 아홉시경이었는데도 아버지는 귀가치 않았고 새어머니는 여전히 자리 보존하고 누워 인사를 해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신음소리만 뱉어냈다.
저녁 때 혼자 먹은 듯한 밥상을 머리 맡에 밀어 놓은채 였다. 다행히 밥그릇과 반찬 접시들은 들러붙은 밥풀떼기와 양념 찌꺼기만으로 비어 있었다.
나는 밥상을 주방으로 들어내고 빈 그릇들을 개수통에 넣었다. 그리고 우유 한잔을 데워서 그녀 머리맡에 갖다 놓았다.
“오늘도 찬수에게서 아무런 전화가 없었어요?”
나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좀전보다 더 큰 신음소리를 거듭 낼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어깨를 움짓거려 숫제 돌아누워 버렸다. 내 목소리나 모습조차도 혐오스럽다는 태도였다.
“마음 끓인다고 도움되는거 없잖습니까. 평소에 찬수가 한 말 중에서 걔가 갈만한 곳이나 친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없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고가 났다면 경찰에 신고가 되었을 것인데 그런 일은 없으니 조만간 찬수가 들어오거나 전화가 올 것입니다.”
나는 위로랍시고 그 말을 하곤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녀는 끝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나를 무시하는 태도가 더러는 악다구니 쓰듯 모진 소리 할 때보다 편한 경우도 없지 않았는데 이날 밤도 그러했다.
찬수가 가출한지 엿새째가 되고, 그런대로 집안은 내성이 생긴 듯 유별한 소란없이 지나갔다.
내가 Q신문사에 첫 출근하는 날은 하늘이 눈부시도록 쾌청했다.
새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조차도 내 출근 날을 잊은 듯 반응이 없었다.
나는 여느 날 아침보다 서둘러 세탁소에서 찾아온 양복과 새 넥타이 등으로 정장을 했다.
생명의 늪(35)
입력 200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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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2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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