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안으로 볼 수 있는 유리판 위에 찍혀진 한 점 물은 내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현미경 속의 실상은 많이 달랐다. 정액은 여전히 큰 바다의 물결처럼 출렁거렸으나 뜻밖에도 정충(정자)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활발한 유영이 없고 움직임이 느렸다.
모양도 차이가 있었다. 타원형 대가리가 두개로 붙은 기형의 정충이 있는가 하면 머리와 꼬리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상하가 두루뭉술한 것도 있고, 몸통의 크기도 한결같지가 않았다.
“어때요, 공기자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지요? 불임(不姙)남자의 것입니다. 중금속 오염이 많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과도한 흡연과 음주를 즐기는 사람이에요. 이런 조건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극심한 대기오염 등으로 정자의 생성에 방해를 받고 DNA변화를 몰고 오는 판인데, 사람들이 자기몸 관리에 너무 소홀한 것 같단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들며 호기심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번 사출(射出)하는 티스푼 하나 정도의 정액에 약 3억마리의 정자가 득시글거려야 정상인데, 이 사람은 몇십마리도 안된다는 거지. 그나마 보시다시피 저렇듯 기운이 없어 달리지도 못하니 난관속의 도도한 난자(卵子)를 만날 수가 없는 거지. 하지만, 공기자는 됐어! 대학병원 특히 비뇨기과에 출입할 자격이 충분히 있어, 합격이야! 씨종자 비실거리는 사내는 나는 딱 질색이거든.”
오간호사는 내 정액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시험관에 이름 자를 써붙이고 뚜껑 부분을 조작하더니 그것을 질소통 속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냉동시켜 둘테니 필요하시면 찾아가셔도 돼요.”
오간호사가 미소를 머금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내가 살아 있어 연일 씨종자를 생산하고 있는데 냉동예치가 왜 필요하냐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냥 웃고 말았다. 사람의 씨종자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 그들의 자세에 오히려 신뢰감이 생겼다.
“그럼, 질소통이 바로 정자은행 이겠군요? 예치가 많이 되어 있습니까?”
“예치정자는 넘칠 정도인데 수요자가 점점 줄어드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요.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화하려는 사람들과, 결혼을 해도 아기를 갖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탓일 수 있지….”
나는 불임(不姙)클리닉의 현황을 더욱 상세히 파악하기 위해 여러 가지 궁금증을 질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K부교수는 바로 강의에 들어가야 한다며 서가에서 관계자료 책자를 한권 뽑아 건네주었다. 전국의 불임클리닉 자료가 다 들어 있으니 읽어 보라고 했다.
그가 강의에 들어간다면 내가 비뇨기과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를 뒤따라 함께 연구실을 나섰다. 왠지 그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희귀질환 케이스라도 한건 취재해야겠는데 막막하다고, 나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가 돌아보았다.
“성형외과에서 무질 성형수술이 있다고 들었는데, 흔한 요법은 아닐테니 한번 찾아가 보시지.”
생명의 늪(50)
입력 2004-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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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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