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만 이날 마주 앉은 강기자는 신문사에서의 분위기와 많이 달랐다.
냉소적이고 빈정거리기 잘하고 나를 경원하고 방어하려는 몸짓으로만 경직되어 있는 것 같던 그가, 의외로 조용하고 여리고 선량한 사람으로 다가들었다.
물론 마주한 장소가 당신의 집이고 처해진 입장이 신명날 상황은 아니라 해도 사무실에서와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중학생으로 뵈는 소년이 책가방인 듯 싶은 배낭을 메고 거실에 놓여 있는 과일 바구니를 주방의 싱크대 위로 올려 놓으면서 나를 향해 “잘 먹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강기자를 향해 학원을 다녀 오겠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가야지.”
강기자가 아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수철이랑 치즈 떡볶이를 먹기로 했거든요. 밥을 먹고 가면 제가 많이 먹지를 못해요. 두분 시장하시면 밥솥에 밥 가득 해놓았거든요. 꽁치조림도 해놓고 김치도 썰어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니 꺼내 드세요. 제가 시간이 없어 그냥 가걸랑요!”
소년이 방글방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강기자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하곤,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아니 현관문을 밀다 말고 다시 한번 나와 강기자를 돌아보며 활짝 웃고는 출입문을 소리나게 닫곤 가버렸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강기자를 바라 보았다. 동안의 앳된 소년이 마치 어른처럼 신경을 쓴다 싶어서였다.
강기자가 웃었다.
“저 녀석은, 손님이 있으면 더 아빠를 챙긴단 말입니다.”
“요즘 아이답지 않게 효자이네요! 밥을 해놓고 김치까지 썰어 놓았다니 말입니다! 아빠 엄마가 맞벌이를 하시니 시키지 않아도 제몫으로 알고 일을 하는 모양이군요.”
그가 웃음 끝으로 씁쓸한 표정이 되며 또 한잔 물을 따라 마셨다.
“얘기를 안할 수도 없구먼….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인데, 이 집 주부라요. 3년전에 내가 이혼을 했어요. 그러니까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적인데, 녀석이 그때부터 나서서 밥을 짓기 시작하는 겁니다. 김치와 밑반찬은 전부 사다 먹지만, 밥은 꼭 자기 손으로 하면서 앞으로 10년간은 새엄마를 얻지 말래요. 자기 엄마가 다시 집으로 들어올 것이니까, 그때까지만 불편하더라도 참아달라는 겁니다.”
그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럽게 자기 가정의 결손 내용을 말했다. 나는 예상 밖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처음 듣는 말이라고 했다.
“당연히 공기자가 알 수 없는 내용이지요. 회사의 누구도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특히 식탁 부근의 주방 안이 하도 어수선하여 맞벌이하는 집이 다 그렇겠거니 미루어 헤아리던 것이 오판이었음을 깨닫는다.
“공기자가 오기 직전까지도 내가 술마시는 것이 미워서 온갖 잔소리를 퍼부어 대던 아이가, 자기 딴에는 손님 앞이라 나 술 그만 마시고 밥 챙겨 먹으라는 말을, 그렇게 점잖게 표현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늪(174)
입력 2004-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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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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