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봐, 이태백이 수두룩 구더기 끓듯 한데. 마흔 다된 나를 써줄 데도 없고, 보담도 개코같은 인간들 눈치보지 않고 내 의지대로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서 사업가로 변신키로 했어.”
“글쎄, 무슨 사업이요?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요? 신중하게 생각하셔서 결정하시라구요. 잘못 하다가는 얼마되지 않는 퇴직금 날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가 웃었다.
“이미 투자는 끝났어. 사실은 며칠전 밤부터 워밍업에 들어갔지!”
나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많이 궁금해? 붕어빵과 군고구마 사업. 우리 동네 어귀에서 어젯밤까지 나흘째 해보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나는 계속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밑천이사 손수레와 고구마 구이통, 밀가루, 팥, 고구마만 있으면 돼. 군고구마 땔감은 야산자락이나 공사장에 가면 버린 나무토막들이 지천이고, 붕어빵이야 연탄 몇장이면 돼. 자존심? 그게 밥 먹여주나? 넓고 넓은 서울바닥에 이웃 또한 없으니 아는 사람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고, 어쩌다 만나면 챙이 긴 모자 꾹 눌러 써버리면 그만이야.”
“생각 참 잘하셨어요! 강선배님께 그런 화통한 측면이 계신 줄 몰랐어요. 혼자서 고구마 구우랴 붕어빵 구우랴 힘드시지 않으세요?”
“손님이 줄이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할만 했어. 하지만 공기자는 눈독 들이지 말아. 당신은 젊고 실력이 있으니까 아직 화이트칼라로 살아야 해.”
“아무튼 선배님의 새 사업 축하합니다! '할일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당당하셨군요!”
그날 강기자와 점심 겸한 각 두병 정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각각 헤어졌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맥주로 입가심을 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오늘은 일찌감치 사업을 시작해 보아야겠다며 다음에 만나자고 했다.
“힘내… 당신은 구제될거야….”
그는 그말 한마디로 팔을 높게 쳐들어 보이고 돌아서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섰다가 다시 신문사 건물을 향해 걸었다.
한때는 가장 증오하고 혐오하던 선배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코뼈 골절사건 이후로 친형제처럼 가까워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사업이 정말 잘되기를 속으로 기원했다.
건물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과수정원을 한바퀴 돌았다. 쓸쓸한 마음 탓인지 을씨년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잎 떨어진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첫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잿빛 하늘을 이고 우두커니들 서 있었다.
과수정원이 허전한 경우는 이렇듯 잎사귀며 과일이며를 다 떨구어 버리고 벌거벗은 나목으로 서 있을 때였다. 새로운 생명을 움틔우기 위한 성스러운 준비기간이라 해도 사철푸른 정원수로 꾸며진 정원에 비하면 쓸쓸해 보이는 것이었다. 이날은 유독 더 허전하게 느껴졌다.
나는 건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경비실에 부탁하여 포장 끄나풀을 구했다.
편집국에 들어서자 거의 다 떠나가고 두명만 남아 짐을 꾸리고 있었다. 내 책짐은 세 뭉치로 자그마치 30㎏은 될 것 같았다.
6시경, 나는 8개월여를 최선을 다해 일했던 Q신문사 편집국을 떠났다.
생명의 늪(216)
입력 2004-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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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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