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자의 뒷말을 뒤통수로 들으면서 나는 그녀들 앞을 물러나 회사를 나왔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민기자의 나에 대한 관심은 상큼한 배맛처럼 언제나 신선했다. 끈적하지 않고 여운이 없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이면서도 회사경력 2년 선배인 그녀는 내가 입사할 당시부터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었다. 그러나 서툰 업무에 치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나에게 그녀는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언짢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몇차례의 저녁 데이트 초청에 한번도 응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견습기자의 애환을 백프로 이해한다는 듯 경쾌하게 “알았어요.” 했을 뿐 나를 시종 편하게 해주었다. 그녀가 섭섭해 하거나 원망스런 낯빛으로 나를 주시했다면 섬세하고 여린 나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무관심 속에서도 편집부로 넘어간 내 기사의 편집(제목 만드는 일 등)에 호의적으로 신경을 써주었고, 기사에 대한 격려나 칭찬을 지나가는 말처럼 들려주기도 했었다.
대학 학보사에서 편집장을 지냈다는 그녀는 센스와 순발력이 있어 국장의 신임을 유달리 받고 있는 처지였다. 재임용 리스트에 편집부에서는 부장보다 1위 순위 예정자였던 것이 그대로 이날 증명된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날 연희누나 앞이 아니었다면, 재임용된 기자끼리 모이는 것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민기자의 의견을 이날은 존중해 주고 싶었었다. 그러나 누나의 심기를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나는 계획했던 대로 강기자의 동네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우수수 탈락된 8명의 취재부 기자 중에 강기자는 대표적인 인물격이라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정작 탈락됐음이 확인되자 이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찾아가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굳혔던 것이다.
달동네 아래의 어귀에서 군고구마와 붕어빵을 만들어 밤에만 판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일단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먼저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반갑잖은 소식 미리 알려 마음고통을 줄 이유도 없지만 혹여 언짢은 마음에 내 방문을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탈락될 것을 미리 알고 붕어빵을 굽기로 이미 전을 폈다지만 확실한 사실을 알고난 후의 기분은 상처 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강기자가 사는 동네 어귀에 닿았을 때는 다섯시 정도였다. 짧은 겨울해라 황혼녘이긴 해도 어둡지는 않았다.
그런데 강기자 바로 그가 동네 어귀에서 눈·코·입만 내놓은 벙거지 같은 털모자를 눌러 쓴 채 군고구마 드럼통의 불구멍을 쇠꼬챙이로 조절하고 있었다. 붕어빵을 굽는 기계도 옆에 붙어 있고, 이미 구워진 빵들이 빵틀 위에 수북히 쌓여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사람 얼굴을 쳐다 보지도 않고 말했다.
“잘, 팔려요?”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아니, 공기자! 이거 어쩐 일이야? 어서와!”
그가 불에 그슬린 막장갑을 벗고 내 손을 왈콱 잡았다. 많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생명의 늪(231)
입력 2004-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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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3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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