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그간 그녀의 도움을 적지않게 받았던 셈이었다. '나'라는 사람과 직장을 백프로 믿으니 보증금을 우선 받지 않았고 그녀의 가전제품을 비롯한 책상 침대까지 무상으로 사용했고 뿐만 아니라 그녀는 2, 3주에 한 번 정도 밑반찬을 챙겨다 주곤 했었다.

별거하는 어머니 혹은 친누이가 있다면 그런 정을 베풀어 주려니 혼자 멋대로의 기분을 누리기도 하고 그녀를 향한 사랑이 더 솟구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녀로부터 향유한 그런 사랑과 따뜻함이 소멸되었음을 생각하면 삭막하고 억울하기가 비유할데 없이 컸지만 체념해야 되었고, 어차피 성취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끝맺음에 비굴·비열·유치스러워서는 결코 안된다는 마음이었다.

민기자와 편집국에 들어서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호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 바로, 과수 정원으로 좀 내려오지 않겠어?”

오연희였다. 그녀는 심하게 굳어진 음성으로 빠르게 말했다. 마침 민기자가 편한 근무복을 바꾸어 입기 위해 비어있는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반문하자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나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녀가 조금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당신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무조건 달려 내려와야 할 공찬우가 용건을 묻고 있는 사실이 순간적으로 생경스러울 것이다.

“할 얘기가 있어.”

그녀는 마음을 다스린 듯 곧 힘이 빠져 나가는 음성으로 반응했다.

“듣고 싶은 얘기가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휴대폰을 꺼버렸다. 물론 내려가지 않았다. 제반사가 귀찮고 몸 마음 모두 피곤할 뿐이었다. 당장의 원이라면 어디 사람 없는 곳에 잠적하여 한 숨 푹 잠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럴 형편은 천만에 아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취재 메모장을 꺼내 이 날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0, 20분이 지나자 직원들이 하나 둘 출근하면서 사무실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경리를 담당하는 여직원이 메모지 한 장을 조심스럽게 내 눈 앞에 내밀었다. 의사회 오연희 차장이 복도 휴게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메모를 전해준 여직원이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알았어요.”

나는 간단히 대답해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버티고 있다가는 그녀가 직접 사무실로 찾아 올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녀나 내 입장이나 주변에 알려서 수군거리게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복도 끝 휴게실에는 오연희가 혼자 서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잽싸게 손에 쥐고 있던 오피스텔 열쇠를 먼저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 얼굴을 찌를 듯 쏘아보았다. 그녀가 눈길을 떨구었다.

“찬우씨에게 미안하다는 말, 할 자격도 없는 죄인이란거 알아…. 하지만 무턱대고 가방들고 나가면 어떡해. 찬우씨 결혼 할 때까지 오피스텔 이용하라구….”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들면서 후두둑 눈물을 떨구었다. 열쇠를 내밀고 있는 손이 흔들렸다. 복도 끝 쪽에서 사람소리가 났다.

“내가 어떻게 살든, 관심 가지실 일 없잖아요. 다만, 출산 후 친자 감별하고 내 자식이면 내가 데려온다는 것, 그것만 유념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