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내 딸 데려다 주어서 고맙소. 나 채형이 애비요.”
“안녕하십니까, 저 공찬우라고 합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면서 내 얼굴이며 몸을 자연스럽게 살펴보듯 했다.
“채형이한테 공찬우씨 얘기 들은 적 있어요. 괜찮다면 우리집에 가서 차 한 잔 하고 가시겠소. 집이 멀지 않아요.”
“아닙니다. 밤이 늦어 폐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는 다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곤 돌아섰다.
민기자의 아버지에게 많이 미안했다. 미성년의 나이는 아니라 해도 내가 민기자에게 술을 넘치도록 마시게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또한 민기자의 기분이 울적한 것도 그녀의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그는 더 붙들지 않았으나 내가 초등학교 정문 앞을 벗어날 때까지 돌아서지 않고 지켜보는 듯 했다.
나는 민기자의 아버지에게서 민희찬 이사의 모습을 보았다. 가로등 불 빛 아래이긴 해도 훤출한 키며 흰 살결이며, 사촌간이라는데 마치 친형제 같은 모습으로 비쳐졌었다. 그가 공보이사를 닮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실제 나는 적잖이 긴장했었고 어서 그들 앞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었다.
그가 나를 굳이 한 밤에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통 상식이라면 밤 늦도록 딸과 술을 마신 사내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는 어려울 듯 한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초청을 했다면, 그것은 공찬우란 인간을 밝은 곳에서 한 번 찬찬히 관찰해보자는 의중일 것이었다. 사양하고 잘 돌아섰다는 생각이었다. 이즘의 머리 상태로는 그 누구하고도 특히 복잡하고 조심스런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작부터 머리에 유착되어있는 상념은 오연희가 앓는다는 내용이었다. 정작 혼자가 되자 마음은 온통 그 내용으로만 몰려져 입술에 자조를 머금게 했다. 내 마음이 아직도 원망과 섭함과 분노와 증오와 배신감으로 가슴이 뜯기는 듯 아픔이 자심한데, 가해자인 오연희도 앓아누울 만큼 마음이 편치 않다는 사실이 통쾌하고 고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건해 보이지 않는 더욱이 태아를 가진 그녀의 몸이 계속 혹독한 고통을 겪는 일은 모면되었으면 싶었다. 나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아기를 이유로 그녀가 힘든 고통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을 모면했으면 생각을 앞세우면서도, 심층 밑바닥에 그녀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또 하나의 마음가닥이 내 속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증오와 애틋함을 함께 버무리며 휘청대는, 이러는 자신이 가소롭고 혐오스러웠지만 그것이 당금의 내 모습인걸 또한 어쩔 수 없었다.
회사 건물에 거의 당도 할 때 쯤 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민기자였다.
“갑자기 울 아빠가 나타나서 놀랐지요? 주일에 교회도 가지 않고,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며 만든 반찬을 끌어안고, 집을 나간 딸이 만나는 남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셨대요. 당황했을 거 같아 전화 했어요. 내가 그냥 친구로 직장 동료라고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으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부담 갖지 않아요. 그런데, 속 괜찮아요? 아까 많이 부대끼는 것 같던데…. 민기자에게 소주 두 병은 과해요. 한 병 이상은 절대 금주 하시라구요.”
“술에 부대껴서 훌쩍거린 거 아니예요. 내 자신이 웬지 너무 초라하고 불쌍하게 느껴져서요. 잘 자요.”
그녀의 전화는 그 말을 끝으로 끊어져버렸다.
생명의 늪(331)
입력 2005-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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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3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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