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생명으로 완성된 핏덩이가 자궁 속으로 들어온 무자비한 의료기구를 피할 수 없어 새하얀 공포감에 질린 채 찢기어 죽었을, 아니면 유도분만으로 만출되어 쓰레기통으로 폐기됐을 그 여린 생명에의 아픔으로 가슴에 쉬임없는 통증이 반복되었다. 나는 방향도 잡지 못한 채 무작정 걸었다. 지금의 마음상태로는 어떤 일도 어떤 생가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냥 걸었다.
어디쯤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나는 즐비하게 늘어선 포장마차집을 발견했다. 반가웠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마셨다. 한 병을 비우고 다시 두 번째 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를수록 새 울음 같은 비명을 지르며 버퉁거리고 죽어갔을 핏덩이의 영상이 더 뚜렷하게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나와의 인연을 식칼로 무 잘라내듯 분명하게 절단하는 오연희의 차거운 모습도 서늘한 바람으로 가슴과 머리를 곤두서게 했다.
그러나 일면 심장을 관통하는 한줄기 통풍의 기분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학대하고 의자를 휘둘러 전신을 활활 태우는 불같은 분노를 짧은 순간이나마 풀어냈기 때문이었다.
소주 두병이 비워질 때쯤은 해가 설핏하니 서녘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유치스럼의 극치를 넘어, 기우는 해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슬플 이유가 무엇인지 집혀지지도 않은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 병째의 소주를 시켰을 때, 포장집 주인여자가 딱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면서 그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집,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어요?”
대낮부터 술을 퍼고 훌쩍거리고 있는 내 꼴이, 고달픈 실업자의 형상으로 클로즈업되는 모양이었다.
“그, 그럼요, 가야지요…우리 어머니와…, 아주머니 같은 다정한 누나가, 하이우 내 아들아! 내 동생아! 보듬어 주는, 집으로 내 집으로 가야지요….”
나는 여자에게 계산을 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몸뚱이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빈 속에 강술을 마셨기 때문인 듯 했다.
“휴대폰이….”
여자가 내 주머니 켠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꺼냈다. 민기자였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 음성이 왜 그러세요? 공기자님, 우시는 거예요?”
“우, 울기는요…감기 들어서 목이 잠겼을 뿐인데. 왜, 왜 전화 하셨는데요?”
“세상에, 대낮부터 술, 드신거예요?”
그녀의 음성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 직원들이 들을 것을 염려하여 편집국 밖으로 장소를 옮기는 듯 했다.
생명의 늪(337)
입력 2005-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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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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