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는 설렁탕도 해요. 장사가 되지 않으니까 메뉴를 바꾸어 보는 거지요.”
그녀의 기분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나는 소주 한 병과 돼지볶음이 첨가된 두부김치 만으로도 저녁 요기는 충분히 되었지만 그녀의 뜻을 따랐다.
“짐 챙기는데, 내가 도울 일이 없어요?”
식사가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신혼살림집이 될 3층 병원으로 어서 옮기자는 그녀의 채근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옮기는 것은 하루쯤 미루었으면 싶었지만, “어서 둘이 함께 있고 싶다구요…”하며 열쇠를 들어보이는 그녀에게 그러자고 했다.
관리실 지하방으로 내려가서 내 짐을 챙기는 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양복 세 벌과 속옷 티셔츠 청바지 점퍼 등의 옷이 가방 한 개에 가득 차고 책 두 묶음이 전부였다. 놀라워하는 정 노인에게 결혼 때문에 나가게 됨을 말하곤 그간의 신세를 잊지 않겠다고 했다.
“신세라니요? 밤마다 나 대신 방범까지 돌아주고…내가 오히려 신세졌지요. 그런데 전기밥솥이며 냄비며 찬그릇이며 공 기자님이 마련해 놓은 저 주방기구들은 왜 챙기지 않수?”
“그건 아저씨가 그대로 쓰세요. 당직하시는 분들 야참도 해먹고 아저씨도 매식하시는 것 보다 조금씩 끓여 잡수시는 것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하기사 결혼하면 저런 건 신부가 혼수로 다 해오지. 어떤 규수인지 모르지만 진짜 알짜배기 일등신랑감 낚아가네!”
나는 노인의 축하말을 들으면서 짐을 현관 밖으로 들어냈다. 그리고 카페의 민 기자를 현관으로 나오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카페에서 내려와 현관문 안쪽에 서 있었다.
“어머, 짐이 이것 뿐이에요?”
큰 가방 한 개와 두 묶음의 책 뭉텅이를 내려다보던 민 기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요, 이게, 내 재산 전부입니다!”
나는 약간의 자조를 머금고 말했다.
마침 택시를 잡아주겠다고 대로변으로 나가던 정 노인이 느닷없이 나타난 민 기자를 바라보면서 의아한 낯빛이 되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민 기자가 정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그간 우리 공기자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아니, 그 그럼 민기자님과 공기자님이….”
“네 다음주에 우리 결혼해요! 아저씨 초청할게요!”
그녀의 밝은 음성이 떨어지기 바쁘게 현관 앞에 에쿠스 한 대가 멎고 운전기사가 서둘러 나오더니 민기자에게 인사를 했다.
“엄마가 짐 실으라고 보내주셨어요. 박 기사님, 이 가방과 책묶음 트렁크에 실어주세요.”
예상 밖의 친절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떠밀리듯 차 속으로 들어가 앉았고 그리고 40여분쯤 후에 돈암동 주택가의 진입로에 세워진 산뜻한 3층 건물 앞에 도착했다. 병원인 1,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3층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생명의 늪(379)
입력 2005-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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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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