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아버지를 찾아서 < 475>
17. 아버지를 위하여 ①

칠복이가 과외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섰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머! 눈이 내리시네. 선생님, 우산 쓰고 가세요."
아주머니가 첫눈에 잠깐 감동하고 나서 신발장 위 붙박이장에서 우산을 꺼내주었다.
"첫눈은 맞아도 겨울 한 철 약이 된다고 했으니 맞고가겠습니다."
골목을 나서니 가로등 불빛 아래 뽀오얗게 쏟아져 내리는 푸짐한 눈발이 보이었다. 칠복이는 집으로 들어가는 버스에 오르려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는 뭔가 허전해서 차 한 대를 그냥 떠나보냈다.
먼저 오문희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방학이라 시골집에 내려갔을 테니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집이 강원도 어디라고 들었던 것이다.
기말고사를 치를 때 강의 노트를 빌렸었는데, 오문희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었다. 시험이 끝나고 바로 방학에 들어갔으니 오문희와는 친할 기회도 없었다.
오문희를 만날 수 없다는 허전한 가슴 한켠으로 대신 노혜미가 자리잡았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리해놓은 노혜미를 다시 만나는 일은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일이다.
아무튼 한동안 노혜미의 집에 발길을 끊은 것만으로, 칠복이의 강의실을 찾아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관계가 정리 된 줄 알았던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노혜미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을 거라는 추측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첫눈의 낭만에 실려 저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성욕이 불쑥 솟아오르면서 노혜미가 그리워진 것이다.
미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무심코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오르고 말았다. 텅 빈 버스는 눈 내리는 늦은 도심지를 질러갔다.
차창 밖으로 눈 내리는 도시 풍경이 내다보였다. 눈 덮여 가는 도시는 차츰 풍선처럼 부풀어 가고 있었다.
교문에서 내려 천천히 학교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부터 환하게 켜진 가로등 불빛은 멀리까지 이어져서 마치 신기루에 떠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보이었다.
비로소 칠복이는 마음을 정리했다. 노혜미를 찾는 일은 별수 없이 아버지를 닮아 가는 일이다. 그래서 칠복이는 눈 덮인 교정이나 둘러보기로 작정했다.
도서관 앞 넓은 광장에 눈이 소복하게 덮여 있었다. 도서관에서 휴식 나온 학생들 몇몇이 눈덩이를 뭉쳐서 두어 개 던지다 들어갔다. 칠복이는 저렇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돈벌이를 해야하는 자신이 새삼 서글프게 느껴졌다.
일복이형이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농협에서 몰래 얻어간 빚 때문에 몹시 허덕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칠복이는 과외를 하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을 것 같아서 몇 달 째 돈을 모아오고 있었다. 일복이형은 가을걷이가 끝나자 자취방으로 형수와 함께 가을걷이한 쌀과 양념들을 가지고 올라왔었다.
일복이형은 사뭇 말없이 앉아 있다가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난 뒤에야 형노릇도 못한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던 것이다.
"현칠복씨…"
뜻밖에, 등 뒤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오문희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