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폭풍의 계절
 12. 더 높은 곳을 향하여(8)

 “여기 소주 한 병 주쇼.”
 이기용은 이제 좀 당당하게 세상을 살기로 작정하고 사내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 행여 말이라도 삐딱하면 대들 참인데 사내는 만원 짜리를 받은 탓인지 말없이 소주병과 잔을 가지고 왔다. 이기용은 물컵을 들어 식당 바닥에다 버리고 나서 컵에다 소주를 철철 소리가 나도록 따라서는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안이 따갑다 못해 화끈거렸다. 갑자기 독한 술을 받아들인 열기가 창자를 걸쳐 온몸으로 퍼져갔다.
 이기용은 소주 한 병과 짬뽕을 국물까지 말끔하게 비우고 식당을 나왔다. 벌써 온몸으로는 어릿한 술기운이 퍼져나갔고, 좀은 기분도 풋풋해졌다. 술이 사람을 이렇게 편하게 해주는구나 싶었다. 당분간 어디로 도망을 쳐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눈앞에 약국 간판이 눈에 띄어 물파스와 상처를 치료할 소독제를 샀다. 그리고 구멍가게로 들어가 소주와 며칠 동안 먹고 지낼 라면이나 빵을 사서 시외터미널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서대전역 앞을 지날 때는 기차를 타야겠다는 충동이 일어서 버스를 내렸다. 기차표를 사면서 비로소 지리산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을 갔을 때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람들도 오갈 데가 없어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일까. 기차를 타는 시간까지는 한 삼십분 쯤 남아 있어서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미스 박이 전화를 받았다.
 “부사장님, 거기가 어디예요?”
 미스 박은 그래도 이기용의 목소리가 반가웠던지 들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다 부질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사장 놈한테 고스란히 말려든 거여. 사무실 좀 정리 햐. 집기도 다 부서져서 쓸만한 것도 없겠지만, 전화 반납도 하고 가게도 내놓아서 몇 푼 남는 기 있을 텐께 월급 못 받은 것으로 대신 하란 말이여.”
 “…알았어요. 그런데 부사장님 몸은 괜찮아요?”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여.”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얼른 끊었다.
 발작을 하듯이 퍼붓는 빗소리 때문에 이기용의 말이 끊겼다.
 “그래, 지리산에는 얼마나 있었냐?”
 김대홍이 이기용에게 술잔을 넘겨주면서 물었다. 아무래도 오늘밤에는 별수 없이 '누드 하우스' 신세를 져야겠다고 작정했다.
 “한 해를 얹혀 살았는데, 정말 심심해서 못살겠더라. 한 해 동안 뭘 했냐하면, 날마다 칡뿌리를 캐기 시작했는데, 이게 내 팔자를 바꿔놓았어.”
 “팔자를 바꾸어 놓다니? 칡뿌리 캐다 도라도 깨달았단 말이냐?”
 “한번은 세상이 하도 궁금해서 시장 구경을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칡즙을 내어 파는 거라. 한 잔을 사 먹으면서 칡뿌리를 어디서 구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장에 나오는 거를 산다는 거라. 그래 내가 칡뿌리를 얼마든지 대 줄 수 있다고 말했더니 그 아자씨 말이 걸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