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고건 전 총리가 서울시장의 자격요건에 대해 언급한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최근 최악의 황사사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만 가지고는 윤택한 삶을 살 수가 없다”고, 시장이라면 문화보다는 환경을 중시하는 마음가짐이 더 긴요하다는 요지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광역 또는 기초를 막론하고 지방정부들은 경쟁적으로 문화관계 대형 건축물을 지어댄다. 일단 세워놓으면 내용은 차츰 채워질 게 아닌가 하고 느긋이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준비된 내용과 잘 짜여진 기획없이 덩그러니 건물만 세워서는 소기의 성과를 얻기 어렵다.

건축업자 좋은 일만 시키기 십상인 중복적 신축투자와 함께 축제를 비롯한 각종 이벤트 만들기도 대유행이다. 이 종작없는 문화바람 속에 자칭 타칭 문화전문가들이 도처에 횡행한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 진짜 문화전문가는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물론 문화 각 분야, 예컨대 문학·미술·음악·무용·연극·영화등등에서 이론가·창작가 그리고 행정가들이 배출됐지만 이들이 문화전문가와 바로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문화전문가라면 좁은 의미의 문화 즉 문학예술은 물론, 넓은 의미의 문화 즉 생활세계에서 영위되는 삶의 방식 전체를 함께 아우르는 시야에서 통합적으로 '문화'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자라야 한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이어 이제야 학부에 문화론 관계 과들이 속속 태어나는 형국이니 새싹이 크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더구나 과를 창설하는 초창기인지라 교수·교재·교학등의 어려움으로 당분간 시행착오를 면치 못할 터이니 문화의 가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준비부족이 뼈아프다. 이 점에서 고건 전 총리의 일갈은 우리 사회의 이상한 문화열을 해독하는 효과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부작용 때문에 문화를 뒤로 돌려야 할까? 문화보다 환경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그 발언 속의 '문화'는 좁은 의미의 문화다. 즉 예술가들이 작품을 창작하고 매개자들이 작품을 공연물로 가공해 시민들이 비로소 향수하는 과정에 한정되는 문화다. 도서관·극장·음악당·미술관·박물관등에서 이뤄지는 독서회(또는 낭송회)와 공연과 연희와 상영 그리고 전시회로 구성되는 이 문화활동은 자연히 고급문화 중심이니 투여되는 자본에 비해 향수층은 비대중적일 수 있다. 이 점에서 좁은 의미의 문화보다는 시민생활 전반에 긍하는 환경이 선차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 양자는 삶의 질에 대한 요구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기원을 공유한다. '입고 먹는 것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옛말처럼 일반적 궁핍에서 해방됐을 때 예절을 따지게 된다. '예절'을 요새식으로 풀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콘텐츠인데, 문화와 환경에 대한 관심이 그 핵심일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의 경우 환경이 먼저 제기됐다. 민주화가 대세로 자리잡은 6월항쟁(1987) 이후 환경운동이 정식의제로 채택돼 문민정부 출범(1993)을 고비로 시민운동의 주류로 부상했다. 환경운동의 발전은 문화운동의 굴기를 이끌었다. 민주주의의 진전정도와 긴밀하게 호응하는 현재의 문화열은 한국인들이 다른 삶을 꿈꾸고 있다는 증표다. 세상은 변했는데 정치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제도는 아직도 구태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영화들의 행진은 탈냉전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생활세계의 건축을 요구하는 문화혁명에 대한 요구라고 보아도 좋다. 그러니까 환경이 문화보다 선차적이라는 지적도 낡은 것이다.

수명을 다한 개발독재시대의 엔진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작부터 제기되곤 했다. 나는 문화가 새로운 성장동력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광의의 문화를 축으로 탈냉전시대 한국사회의 밑그림을 새로이 마련하는 과정에서 새 동력의 단초가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예감을 지닌다. 4월혁명이 문화혁명의 진정한 출발이었다는 점을 새삼 새기며 문화라는 동력에 대한 좀더 적극적 재인식을 촉구하고 싶다.

/최 원 식(인하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