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비심리가 크게 살아났다고 합니다. 부동산가격이 오르고 카드 사용
액수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서점에 가보면 이런 소비심
리가 과열되었나 싶을 정도로 썰렁하기 그지없습니다. 서점이 호황이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걸 보니 국민 독서량과 경제호황은 전혀 별개인가 봅니
다. 하긴 불황이 극심할 때 오히려 책이 많이 팔린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 책값이 참 많이 올랐다는 것, 종이의 질이 너무 고
급스럽다는 것, 불과 몇 년 사이에 꽤 많은 미술 관련서적이 나와 있다는
것이 형편이 나아진 우리경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요. 10여년 전 만해도 우리의 미술관련서적은 아주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
습니다. 몇몇 출판사가 이론서 위주의 미술서적을 선보였을 뿐 컬러판 화집
을 구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지요. 하지만 지금은 미술관련서적이 다양
할뿐더러 특히 문고판의 경우도 종류가 많고 색상마저 미려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서점에 들러 표지가 아주 예쁜 김환기의 '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
까'(아트북스 刊)를 만났습니다. 수화(樹話) 김환기. 한때 가수 유심초가
가슴 저미게 불렀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그린 화가.
김환기의 절친한 친구였던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쓴 이 책은 3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그의 예술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책 중간 중간에 본인
과 주변사람들의 글이 수록되어 있어 그가 어떤 미술세계를 추구했는지 잘
알 수 있지요. 그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만, 김환기의 점묘화에
대해 한때 매료되었던 저로서는 이 책이 마치 가뭄 속의 단비처럼 쏠쏠하
게 책 읽는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문장력이 만만치 않았던 김환기의 글(편
지, 일기)을 읽는 재미도 남달랐구요. 김환기는 늘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
인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화가였습니다. “모든 것은 점 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했지요. 이중섭에 대한 남다른 애정도
갖고 있었다는군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그동안 그에 대해 가졌던 궁금증이 풀렸습
니다. 물론 화풍 탓도 있겠지만 김환기의 그림 속에서는 그리움과 따뜻함
만 가득할 뿐, 왜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화가들처럼 처절함과 연민은 찾아
볼 수 없었는지 말이지요. 그래서였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
는 김환기보다 오히려 이중섭, 박수근, 이인성, 권진규의 그림과 조각들이
떠올라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해방전후의 예술가들은 대체적으로 힘겨운 생
활을 영위했지요. 특히 화가들의 삶은 생활고와 싸워야 하는 처절한 이중고
에 시달립니다. 이중섭은 화구 살 돈이 없어 담배 속지에 그림을 그리고,
박수근은 냄새나는 미군병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연명했으며, 이인성 역
시 가난에 쪼들려 기인생활을 하다 요절하고, 권진규도 가난과 외로움에 견
디다 못해 자신의 아틀리에에 목을 매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 내몰렸었지
요. 그런 면에서 김환기는 이들과 분명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나마 그들
보다 생활의 형편이 나았던 거지요.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프랑스로 그리고
미국에서 그는 여한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론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최
고의 화가 반열에 서있는 거목이지만…. 세상은, 늘 그런가 봅니다. 재능
과 여건을 동시에 주지 않는다는 것. 그런 면에서 김환기는 분명 동시대 화
가들보다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책장을 덮은 후 저는 김환기의 그림보다 오히려 이중섭과 이인성, 박수근
의 남루한 시절에 그렸던 그림을, 권진규의 처절한 테라코타를 보고싶은 충
동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림과 조각을 한 장 한 장 들춰 보았지
요. 그러나 이내 가슴이 싸늘해지는 아픔 때문에 한동안 황사로 가득찬 창
밖을 쳐다보아야 했습니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