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꿈의 구연(球宴)'이라는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지구촌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습니다.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와 남미
의 오지에서도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월드컵이 화제라고 하더군요. 대단
한 월드컵의 위력 아닙니까. 하긴 어디 축구뿐이겠습니까. 우리의 경우 메
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나라전체가 온통 시끄럽
고 그래서 박찬호로 인해 국민들이 메이저리그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 되었
지요. 박세리는 또 어떻구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골프의 그 난해한 경
기 용어가 그녀로 인해 이제는 친숙한 용어가 돼버린 것은 물론, 골프라는
경기 자체도 마치 누구나 할 수 있는 대중적인 스포츠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대중매체와 귀족스포츠 골프가 합작 창출해 낸 착시현상이지
요.
60년대 말, 추석을 앞두고 있었던 10월경으로 기억됩니다. 프로레슬링 경기
가 열린다는 이유로 조그마한 도시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지요. '박치
기 왕' 김일이 온다는 루머까지 겹쳐서 그 분위기는 도시 전체를 삼켜버릴
말 그대로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정말 대단했지요. 허름한 공설운동장에
특설 링이 마련되고 밀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니까요. 그 함
성, 마치 모두 집단 최면에 걸린 듯 광기마저 번득거렸습니다. 하지만 시합
일 '박치기 왕' 김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요샛말로 주최측이 과장광고를 했
던 거지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대신 '당수의 왕' 천규덕이 왔으니까요. 한
국 프로레슬링계의 2인자. 곱슬머리에 발목까지 오는 검정타이즈가 그의 상
징이었습니다. 사람의 숲을 헤치고 어렵게 사인까지 받았던 기억이 납니
다. 코흘리개가 도대체 무엇을 안다고 사인까지 받았었는지 웃음이 나지만
다음날 애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놓았던 그의 사인 때문에 저는 '짱'이 되
었지요.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갑작스럽게 몰락한 것은 그게 다 각본에 짜여진 '쇼'
라는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국민들에게는 상상을 뛰
어넘는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상실감으로 한동안 국민들이 패닉상태에 빠지
게 되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마치 미국 아이스하키의 살아있는 전설 그렉 웨
인츠키가 조국 캐나다를 버리고 미국지역팀인 LA 킹스로 이적했을 때처럼,
일본의 프로야구선수 노모 히데오가 일본을 등지고 LA 다저스로 떠났을 때
일본국민들이 받았던 충격만큼 말이죠. 스포츠의 위력은 이제 우리가 상상
하는 것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스타'(이소출판사 刊)는 13인의 스포츠 스타의 이면에 담겨있는 문
화적, 정치적, 경제적 코드를 분석한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같은 흑인
농구선수이면서 마이클 조던은 '우상'이 되고 데니스 로드먼은 '병리적이
고 동물적인 흑인남성'으로 전락했는지, 망나니 테니스선수였던 앤드리 애
거시가 어떻게 전통적이고 건전한 백인남성으로 안착했는지, 데이비드 베
컴, 마라도나, 노모 등 그 자체가 전설인 스타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
들이 왜 '상업문화의 산물'이 되었는지를 꼼꼼하게 조명합니다. 가령 저자
는 타이거 우즈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미국의 백인 중심 문화지배를 오히
려 승인해 주는 역할이 도사리고 있어 궁극적으로 우드는 인종카드 전략의
희생자라고 주장합니다. 테니스의 스타로 떠오른 윌리엄스자매 역시 미국
대중은 겉으로 그녀들의 성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인종주의 차별
이 은폐되는 좋은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지요. 하긴 지난해 메이저
리그에서 배리 본즈가 맥과이어가 보유한 한시즌 홈런기록을 갈아 치웠을
때 백인들이 보여준 반응이 별로 시덥지 않았던 것을 우린 기억합니다. 모
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그리고 돈 때문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우상처럼
떠 받드는 스포츠 스타들, 그 뒤에 웅크리고 있는 상업매체들의 행태를 적
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 월드컵으로 전 세계가 열광
할 때 어쩌면 FIFA는 돈세는데 열중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포츠
마니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이영재의 즐거운 책읽기] '스포츠 스타'
입력 2002-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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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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