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이 오시던 날 그림카드 이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따뜻한 눈이 내렸습니다'. 따뜻한 눈이라…. 책을 덮고 잠시 내다본 창밖엔 끝물 단풍을 미처 떨구지 못한 나무가 성기게 날리는 눈발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오래 잊고 살았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는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황지우,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
'녹색 잔다르크' 페트라 켈리의 삶이 꼭 이 시 같았다면 감상적 비약일까.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는 새라 파킨이 쓴 페트라의 전기다. 그 자신 영국 녹색당의 중요 멤버이기도 한 새라는 '녹색정치'의 선구자 페트라의 치열했던 삶(1947~92)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재구성해 냈다. 더욱이 둘은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기에, 행간마다 안타까운 추모의 정이 읽힌다. 페트라의 성취와 유산은 물론 실패와 한계까지 고스란히 드러내는 긴 추도사라고나 할까.
빼어난 미모에 유능하고 정열적인 유럽공동체의 행정사무관 페트라 켈리가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3년이다. 그 해 그녀는 '오합지졸당' '정당을 반대하는 정당' 독일 녹색당의 후보로서 독일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세계를 경악시켰다. '귀농을 꿈꾸는 자연주의자, 반체제 철학자, 젊은 무정부주의자,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 낭만적 사회주의자, 고집스런 동물애호가, 마당을 잘 가꾸는 할머니 등등' 현실 기준으로 볼 때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 인생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완강한 현실정치의 장벽을 부수고 '반성 없는 세상'에 일격을 가했으니 그 놀라움이 오죽 했겠는가.
물론 페트라가 없었어도 '녹색세력'은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것이다. 음모와 기만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데만 급급한 기성정치권은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데다 삶의 조건이 황폐해 질수록 겸허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불어 사는 삶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페트라는 그 욕구에 멋진 표현을 선사했다. '우리에게 만약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녹색입니다'. 그리고 페트라는 그 표현을 현실의 장 속으로 '온 몸이 으스러지도록' 밀고 올라갔다.
페트라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존경했다. 의회 사무실에 로자의 사진을 걸어놓고, 어디에서 연설을 하든 로자의 어록을 즐겨 인용할 정도였다. 사상적으로, 시대적으로 완연히 다른 두 여성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상에 대한 헌신'이다. 1919년 혁명의 와중에서 무참히 살해된 로자나, 1992년 한 아파트에서 전직 나토 사령관 출신인 연인 게르트 바스트안과 함께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된 페트라는 길지 않은 삶을 한결같이 '자기의 뜨거운 혀로' 새로운 싹을 내미는데 바쳤다.
아주 잠깐 날리던 눈발이 그쳤다. 역자후기까지 마저 읽고 책장을 덮자니 몇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83년 자신과 함께 녹색당 후보로서 연방의회에 진출했던 요슈카 피셔가 지금은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로서 연방 외무장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오늘날 녹색 꿈을 완전히 삼켜버릴 듯 넘실대는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그녀라면 어떻게 맞설까. 아직도 '적녹색맹'들이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고, 희망의 싹은 찾기 힘든 이 땅의 척박한 현실에 그녀는 어떤 위로를 보내줄 수 있을까. 곧 마지막 잎새까지 떨굴 겨울나무처럼 봄나무에의 꿈을 얼마나 더 꾸어야 할까. 한바탕 따뜻한 흰 눈이 빨리 쏟아졌으면 좋겠다. <양훈도 (문화체육부장)>양훈도>
[양훈도의 책방가는 길] '페트라 켈리-나는 평화를 희망한다' 새라 파킨 著
입력 2002-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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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1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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