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출장에서 막 돌아온 동료가 반갑게 악수를 청합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대개는 활짝 웃으며 손을 맞잡겠지요. 그래도 왠지 찜찜해서 얼른 농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까요. 열나고 기침하지는 않아? 이게 찬란한 밀레니엄 여명기의 한 풍경이라니 아이러니컬하지 않습니까. 17세기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원주민, 유럽인, 아프리카인 사이에 어마어마한 전염병 교환이 이루어졌을 당시의 공포를 누가 이렇게 써놓았다는군요.
'악수를 하는 오랜 풍습이 사라졌다. 많은 이들은 손만 내밀어도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무렵엔 신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역병으로 죽어갔다지요?
책날개에 저명한 과학저술가로 소개된 아노 카렌의 '전염병의 문화사'(권복규 가천의대 교수 옮김, 사이언스 북스)는 인류역사에 나타났던 이같은 역병의 파노라마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줍니다.
선사시대 돌림병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부터 해방됐다고 믿는 현대에도 돌연 창궐하곤 하는 유행병들에 이르기까지 깊이있는 통찰을 곁들여서 말이지요. 카렌은 인간의 시각에서만 전염병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거꾸로 병균의 시각에서 인간사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시점 바꿔보기'가 생태학의 출발점이라면, 카렌은 멋지게 생태학적 관점을 질병사에 접목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카렌이 보기에 유행병은 '생태계가 찢어질 때' 등장합니다. 호모 에렉투스가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인간이 신석기혁명을 통해 농경을 시작했을 때, 대규모 교역과 여행과 전쟁에 돌입했을 때, 인구가 급증하거나 새로운 행동양식을 도입했을 때, 이익을 위해 열대우림을 파괴할 때 등등 문명의 전환기에 맞닥뜨렸을 때 미생물을 포함한 생태계의 그물은 찢겨나가고, 그 결과 전염병이라는 '생물학적 폭탄'은 폭발하고 만다는 겁니다('사스'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마도 그렇겠지만 참 공교롭습니다).
'전염병의 문화사'는 전쟁과 역병의 관계를 재미있게 풀어놓습니다. 1346년 몽골군이 페스트의 창궐로 퇴각하면서 적진 성벽 안으로 페스트사망자의 시체를 대거 날려보냄으로써 유럽 전역으로 이 병을 퍼지게 했다는 에피소드, 1812년 모스크바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이 주로 발진티푸스 때문에 전멸하여 겨우 3만여명만 살아돌아온 과정, 그리고 1918년 스페인독감의 대유행으로 1차 대전의 사망자보다 많은 4천만~5천만명이 죽어간 사실 등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선페스트균이 스스로 공기전염이 가능한 폐페스트로 진화하는 과정을 비롯하여 인류를 괴롭혀온 각종 병원체들의 역사 또한 알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카렌은 책의 후반부에서 우리 인류가 아직도 전염병에 대해 안심할 수 없는 이유도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무서운 건 에이즈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스'는 그 증거일까요, 아닐까요. 생태학적 반성을 하지 못한다면 '사스'는 그저 또 한 번의 맹목적인 공포일 따름이겠지요./양훈도(문화체육부장)
[양훈도의 책방 가는 길]'전염병의 문화사'
입력 2003-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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