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동의하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 사회 구석구석이 민주적이지도, 공화적이지도 않을까요. '참여정부'라니요. '참여'는 민주공화국의 기본가치일진대, 새삼 '참여'를 강조한 것부터가 민주공화국의 일그러진 모습을 일단 전제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하는 명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4월(4·19)과 6월(6월 항쟁)에 잠깐 묵념하고 지나가는 어떤 것일까요.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의 망설임없는 진단입니다. 이 또한 동의하십니까. 민주주의의 제단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바치며 쟁취한 민주주의인데 이렇게 망가지다니요. 4·19 마흔세돌을 앞두고 '한국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라는 부제가 붙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책이 지난해 여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특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민주주의가 회생의 길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겠지요.

새 정부 들어 '호남역차별론'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문민정부 당시의 PK독식론, 국민의 정부 때 호남편중론과 궤를 같이 하는 논란이지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이어가야 하는 걸까요. 정부 고위직의 출신지 비율이 국정을 제대로 수행해 나가는데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러한 인사차별론이야말로 최 교수가 지적하듯이 오도된 갈등구조의 대표적인 사례겠지요.

우리 사회에서 지역갈등은 부차적 갈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고비마다 지역갈등이 갈등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파행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정치 엘리트들은 '전리품'을 손쉽게 챙길 수 있는 '망국적인' 지역갈등론을 언제든 동원합니다.

대다수의 유권자들 또한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지역문제만 거론되면 차별이니 역차별이니 거품같은 논의에 그대로 휩쓸려 들어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곤 하지요. 이런 구도를 그대로 두고는 민주주의가 한발짝도 진전하기 힘든 게 당연합니다.

한국의 현실정치권은 태생적 보수성으로 인해 정작 중요한 갈등은 거의 수렴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최 교수의 분석입니다. 지난 50여년간 지속돼온 반공냉전 이념의 헤게모니, 그에 따른 협애한 정치적 스팩트럼, 강고하게 유지되는 동심원적 엘리트 구조, 국가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해 버린 재벌 위주 경제, 국가를 대신할만큼 커진 보수언론의 여론 독과점 등이 맞물려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최 교수의 분석이 절대적으로 옳은 건 아닙니다. 특히 최 교수의 진단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한국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과 같은 국제적 요인이 빠져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없이 민주주의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그의 논의는 이 시점에서 경청해 볼 가치가 충분합니다./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