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길들이는 일제 식민교육의 잔재에 젖어 비민주적인 교육을 시킨 점을 반성합니다. 원수의 하나까지 쳐부수자며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길러준 반통일교육을 시켜온 죄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살인적인 입시교육에 내몬 죄를 참회합니다.”

지난달 28일 44년5개월의 교직생활을 접은 성남은행초등학교 이상선 교장선생님의 퇴임강연의 한 대목이다. 그의 퇴임강연 내용이 일부 매스컴을 통해 화제가 됐다. 그 내용이 궁금해 이 선생 댁에 직접 전화를 넣었다. 강연 원고를 보고싶다고 부탁했더니 원고는 따로 없다면서, 이미 보도된 참회의 내용을 육성으로 토해내는데, 말의 두서(頭緖)와 조리(條理)가 명료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참회의 내용이 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생각을 통해 윤곽이 잡힌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민주주의 교육 못한 죄' '통일교육 제대로 못한 죄' '아이들을 입시교육에 내몬 죄'에 대한 이 선생의 구체적인 참회내용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지면사정 때문에 힘들지만 학교 현장에 있는 분들이라면 여기에 담겼을 담론의 내용을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 선생의 '44년 교직생활 참회'에 대해 찬·반의견과 유보적 입장 등 다양한 반응이 엇갈리는 것이 사실이고 또 그래야 정상이다. 이 선생의 참회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던 시대상황을 현재의 입장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한 오류'라고 점잖게 비판하거나 '그럼 북한이 원수지 은인이냐'며 극우적 비난까지 내놓을 수도 있다. 학교현장에서도 전교조 소속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간에 견해를 달리할 소지가 충분하다. 아닌 말로 '나는 내 평생 아이들에게 반공교육을 더욱 철저히 시키지 못한데 대해 무한한 죄책감을 느낀다'는 참회가 나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선생의 참회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참회는 고해(苦海)와 같았던 교육인생 전체를 반추(反芻)한 끝에 나온 고해(告解)다. 참회의 언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통과 번뇌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 그 참회가 과연 가치있는 참회인지, 우리 사회가 공유할 참다운 '반성거리'인지는 그 시대를 함께 겪어왔고 현재에 함께 살고 있는 우리가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그 참회의 가치와 무게를 제대로 인정하고 새로운 가치 창출의 계기로 수용할 수 있는 사회라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잃고 혼란에 허덕이는 이유는 '반성'과 '참회'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스스로 친일한 죄를 참회하고 자신을 역사의 제단에 바친 친일파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사람이 10명만 됐어도 광복 이후 한국사의 진로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친일파를 솎아내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으니 참담하다.

우리의 정치사는 어떤가. 국민을 힘들게 하고 역사의 진운(進運)을 왜곡시킨 소위 지도자나 지도자 그룹중 어느 한 사람도 진실한 참회록을 남기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살았던 시대가 그러했으니 이해해달라거나 용서해야 한다'는 박약한 역사인식 자체가 한국사회의 진전을 가로막는 원흉이다.

만일 한 정치인이 한국정치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 끝에 어느날 새벽 장문의 참회록을 쓰는 숙연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나는 국민보다는 총재에 충성했습니다. 국회에 들어가기 위해 선거법은 단 한 조항도 지키지 않았지요. 그리고 내 뜻과는 상관 없이 상대방을 비난하고 모함하는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래서 나의 양심은 누더기처럼 해진지 오래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이 정도의 참회가 몇 사람의 정치인들로부터 나온다면 그 순간 한국정치는 새로운 정치로 방향을 돌릴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대부분 그러한 정치를 하면서도, 그 누구도 참회하지 않는다. 비극이다.

우리를 각성시키는 명예로운 참회가 사회 전분야에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바르게 잡을 수 있다. 이상선 선생의 참회가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지는건 이 때문이다.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