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은 지난 74년 염정공서(廉政公署·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란 검은돈차단 반부패기구를 설립하고 30년 가까이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기구는 부패방지를 위해 사회전반에 대한 강도높은 활동을 펴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그결과 홍콩의 청렴도는 언제나 세계상위 수준이다. 90년대엔 산하에 윤리개발센터도 두었다. 이 센터에서는 기업의 윤리규범제정 및 통제시스템 자문, 윤리교육실시, 윤리관련 정보 및 자료제공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2002년 제정된 우리나라의 부패방지위원회와 법도 이 시스템을 모델로 삼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위원회는 강력한 조사권과 수사권을 보유하고 있는 염정공서와 달리 제정되는 과정에서 각급 기관의 반대와 견제에 부딪혀 접수된 사안들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조사권조차도 부여받지 못한 허울좋은 조직으로 전락, 현재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작금에는 정치권내 검은돈이 만악(萬惡)의 근원처럼 회자되고 있다. 엊그제 대통령측근비리에 대한 특검이 국회를 통과한 것도 검은돈 때문이다. 걸핏하면 100억원이니 200억원이니 하는 비자금을 현금으로 받았느니 안받았느니 하는 그들만의 설전도 이젠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다.

최돈웅 의원이 SK로부터 받은 100억원의 비자금을 현금으로 쌓아놓은 규모를 놓고 여야간 논쟁을 벌이더니 얼마전 현금 40억원을 실은 현대자동차 다이너스티 승용차가 서울 시내를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현장검증이 조만간 실시될 것이라는 신문기사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현대비자금 200억원 수뢰사건 심리를 맡은 재판부가 권노갑씨측의 현장검증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일이지만 관심뒤에 배어나오는 조소(嘲笑)는 모두가 느끼는 슬픔이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의 회사에서 빼돌린 현금 75억원을 빈빌라에 쌓아둔 40대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더니 이 집이 과거 검은돈을 주무르던 여자 로비스트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지면서 다시한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정당히 번 돈도 아닌 돈이 그처럼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인지 매일 돈 걱정을 하고 사는 서민들로선 도대체 짐작이 안가는 노릇이다.

물론 정치권내 부패구조의 규모가 상상을 넘어서서 국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이 일이 아니다. 기업, 정당, 개인의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뿌리고 받는 검은돈 액수도 보통 억단위에서 수백억단위고 검찰조차 5천만원 뇌물은 뉴스도 못된다는 자조섞인 푸념이 나올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정치권내 검은 돈의 거래가 청산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는 담합행위 때문이다. 법에 허용되지 않은 방법 및 규모로 수수되는 정치자금은 거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금일 게 뻔하다. 그리고 이같은 돈과 권력의 검은 커넥션은 정치타락의 요인이자 사회악의 온상이 된다. 그리고 이를 깨기 위해선 정치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그들만의 위험한 합의에 의해 이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속적인 부패의 고리가 이어질 수 있겠는가.

순수한 정치자금이란 꼬리가 전혀 달리지 않은 돈, 그저 특정 정치인의 인품과 경륜을 좋아해서 주는 돈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액수가 커지면 순수하기가 어려워진다. 하물며 기업인이 정치인에게 주는 거액의 돈은 결코 순수할 수 없는 검은돈이다. 요즘 이 검은돈이 정치권을 흔들고 있다. 판도라가 제우스로부터 받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인생의 온갖 재앙과 질병, 고통, 죄악 등이 쏟아져 나온 것처럼 검은돈이든 사과상자든 여는 순간부터 원죄가 시작됨을 그들은 진정 몰랐을까? /정준성(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