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부모형제 너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정말 우렁차게 불러댔다. 그러면서도 ‘진짜 사나이’를 목청 터지게 불러야 하는 자신이 서글펐다.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에 3년을 떼어내 짐승 같이 살아야 하는 ‘폭력막사’가 정말 싫었다. 할 일도 많다는 사나이가 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하나 하는 분노와 울분이 복받쳐 올랐다. 부모형제가 너를 걱정하느라 선잠마저 깨지 않나 싶었다.

핑계 없는 주먹질은 없었다. 집이 서울이라고, 대학을 다녔다고 또는 노래를 못 부른다고, 아니면 애인 없다고 매질이었다. 군화발로 정강이를 걷어차는 ‘조인트’ 까기가 예사였다.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방망이로 핏물이 배어나도록 ‘빳따’를 쳤다. 얻어터져 의무실에 가면 맞고 왔다고 또 두들겨 팼다. ‘병기수입’이니 ‘일석점호’니 하며 잠시도 그냥 두질 않았다. 병영생활의 야만성, 폭력성에 정말 치를 떨었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다면 집합이고 단체기합이었다. 말이 기합이지 때로는 폭력이 난무했다. 그 이유는 누가 말이 어눌하다든지, 행동이 굼뜨다든지 뭐 이런 거였다. 몇 차례 이런 일이 있다보면 그는 ‘고문관’이 되고 만다. 시쳇말로 ‘왕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는 따돌림도 견디기 어려울텐데 툭하면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그러다 나중에 탈영을 했다거나 자살을 했다거나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요즘은 군대생활 좋아졌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고참들의 가혹-구타행위가 여전히 근절되지 않은 모양이다. 사망사고나 자살사고가 잊을 만하면 들린다. 이런 죽음에는 의문사라는 꼬리표가 붙기 마련이다. 그 씩씩하고 팔팔하던 아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는데 어느 부모가 그것을 믿으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숫자가 적은 전경-의경에도 웬 구타사고가 그렇게 많은지? 요즘은 성추행도 많다니 ‘지퍼’ 지키기도 힘겨울 것 같다.

이러니 젊은이들이 군대가기를 싫어 할 수밖에…. 다 가는 군대도 아닌데 누가 사서 고생하려고 하겠는가? 간다면 카투사로 가고 싶어한다. 그곳에는 가혹행위도 구타행위도 없기 때문이다. 창군이래 미국군대의 편대를 그대로 모방했지만 왜 조직운영은 배우지 않는지 모르겠다. 미군 지휘관도 한국군의 구타행위를 잘 안다. 그래서 병영 내에서 구타행위를 엄벌한다. 그 까닭에 카투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리는 없나보다. 물론 과문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미국에는 제대군인법(G.I Bill)이라는 게 있다. 제대군인은 재정부담으로 대학교육과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다. 정부보증으로 주택이나 농장을 구입하기 위한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창업을 위한 금융대출도 정부보증으로 가능하다. 이자도 싸서 일반대출의 절반수준인 3%이하다. 또 정부가 취업도 알선해 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제대군인 239만1천명이 이 제도의 혜택으로 대학이나 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지원제로 바뀐 지금도 제대군인은 복무기간 중에 일정액을 적립하면 장학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러니 미국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면 애국주의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어떤가? 병영생활을 하려면 학습의 기회를 24개월간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공무원 채용시험시 군필자에게 주던 가산점을 위헌이라고 없애버렸다. 9급 공무원을 포함한 각종 채용시험의 응시자격을 대체로 만28세로 제한하고 있다. 많은 제대군인들이 채용시험에 응시조차 못하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또 직장생활에서 군복무 24개월을 보상받을 길이 없다. 동년배의 군미필자나 여성사원에 비해 2년이라는 호봉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군대의 구타-가혹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병역기피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비민주적인 병영생활을 알고 개선하려고 하겠는가? 구타행위로 증오심이 가득한 군대라면 과연 국토방위 의무에 얼마나 충실하려 할지 의문이다. 나만 억울하게 군대에 왔다는 피해의식이나 상실감이 폭력성으로 나타나지 않나 싶다. 제대군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대우를 없애야 병역의무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제 군지도자들도 ‘폭력막사’를 없애 존경받고 품위 있는 군대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한다./김영호(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