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등 공직 후보공천은 미국식과 유럽식이 대조를 이룬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후보는 각 주별로 전국적으로,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후보 등은 해당지역에서 당의 예비선거(primary election)를 통해 결정한다. 유럽각국의 정당들은 각 선거구별로 당원들만으로 또는 그 지역의 각계인사도 참여시키는 심사위원회를 구성, 신청자들의 서류검토 면접 정견발표 선정과정으로 진행한다.
 
우리나라에서 후보공천을 처음 실시한 것은 1954년 3대 국회의원선거에 앞서 집권당인 자유당이었다. 당시 자유당은 실력자와 대부분의 현역의원들은 이미 내천하고 전지역구의 50%정도만 지구당별로 당원대회 또는 대의원대회에서 선출케 했는데 이들중 중앙당 간부들이 재심사해 임의로 후보를 정했다.
 
가장 민주적인 공천은 1958년 4대 선거에 앞서 야당인 민주당이 실천했다. 출마신청자가 복수일 경우 각 지구당별로 당원 또는 대의원대회에서 후보를 선출하고 시도지부의 심사를 거쳐 당 최고위원회에서 인준했다. 이 과정에서 후보결정의 평점을 지구당 80점 시도지부 15점 최고위원회 5점으로 했으나 지구당의 결정을 99% 인정했다.
 
지구당대회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거의 결과에 승복했다. 4대 후보공천 직후 자유당은 탈락자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이들의 경무대예방을 주선했다. 이들에게 당총재인 이승만 대통령은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게 여러분들이 당의 결과를 인정하고 공천자들의 당선을 위해 애쓰겠다니 실로 갸륵하다”고 뼈있는 격려를 함으로써 단 한명도 이탈하지 못하게 했다.
 
아무튼 민주당의 민주공천방식은 1961년 5·16쿠데타 후 완전히 후퇴했다. 그후 역대 여당은 공천심사위를 형식적으로 구성했으나 대통령에 대한 충성도, 지명도, 지역배경 경력과 배경에 따라 사실상 청와대-당총재가 결정했다. 야당은 각파의 중진들로 구성한 심사위에서 경력, 지명도, 지역기반, 재력, 당선가능성을 기준으로 삼았으나 대부분 파벌 안배로 결정함에 따라 능력있는 신인들이 공천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밀실공천시대가 계속된 것이다. 이같은 충성도위주, 검은 돈거래, 파벌안배식의 밀실공천은 지역구민과 당원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소위 위로부터의 낙하산식공천이었다.
 
17대 국회의원선거에 내세울 각 정당의 후보공천작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하고 각 지구당의 여건불비 등을 이유로 당원과 국민에 의한 밑으로부터 상향식 공천이 아니고 여전히 중앙당이 관장하는 하향식 공천작업이란 점에서 아쉬움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당사상 처음으로 심사위 구성에 외부인사를 50~60%로 참여시키고 엄정하고 독립적인 심사, 당지도부의 개입 자제를 내세운 것 등은 파격적이고 진일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부정당들이 “특별한 경쟁자가 없고 단독신청했다”며 80~100여구의 후보를 사실상 정한 것은 개운치가 않다. 인물부족이란 말도 안된다. 좀더 시간을 두고 인물발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또한 검은자금수사여파라지만 각당이 도덕성과 깨끗한 몸가짐을 심사의 제1기준으로 삼고 있음은 잘못이다. 부정부패에 분노한 민심에 부응한 듯한데 도덕성은 상식이요,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능력과 경륜, 학식과 덕망, 개혁성, 건전한 사고, 지명도 등을 중점 검증해야 한다. 도덕성만 내세우거나 얄팍한 인기도에 집착한 나머지 무능하고 부실한 인물을 고를 위험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인사는 인사권자의 능력과 수준이다. 후보공천은 단지 심사위원회의 능력정도가 아니라 당의 수준이요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일부 미흡한 인물들이 포함됐으나 대체로 이정도면 선거에 내보낼 만하다”는 평가를 들을 때 어느정도 선거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은 바른 인물의 공천을 고대하고 있다. /이성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