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민주주의는 18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는 벤자민 디스렐리와 윌리엄 글래드스턴이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토리당과 휘그당의 후신인 보수당과 자유당을 이끈 두 사람은 1860년대 후반부터 30여년동안 치열한 정책경쟁으로 교대로 집권총리를 역임하면서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으면서 대영제국을 이룩했다. 그토록 찬란했던 자유당은 1차대전 기간 중 로이드 조지 내각을 고비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노동당이 득세하면서 자유당은 지금까지 90여년동안 의회에서 국회의원이 10~20명 수준의 소수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1970년대 야당인 보수당이 집권을 위해 합당을 제의하자 자유당은 오랜 전통과 명예를 더럽힐 뿐더러 국민을 배반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정계개편이란 집권등 일정한 목적을 위해 정당간의 합당과 흡수 등의 방법을 통해 정국의 판도·세력 분포를 재조정·재편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미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정계개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정국의 판도는 선거를 통해 국민이 정하는 것이어서 일단 정해진 구도는 결코 바꿔서는 안되며 바꿀 수도 없다는 인식이다.
 
전 세계에서 '정계개편'을 우리나라 정치인들처럼 들먹이는 나라는 없다. 본래 일본정치인들이 쓰는 것을 도입한 것으로 세력이 약할 경우 대화와 정치력으로 극복하려 하지않고 걸핏하면 개편을 들먹인다. 헌정 57년동안 숱한 개편이 시도됐으나 이합집산 수준으로 실패했다. 국민의 지지와 공감을 얻지 못한 인위적인 시도는 실패하고 만 것이다. 최대성공작은 소위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반발로 범야세력이 결집한 1955년의 민주당 창당과 1967년 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중·신한당과 모든 재야정파가 모여 신민당을 창당한 것 등이다.
 
1988년 이래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역대 권력자들은 정계개편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소위 여소야대 국면을 벗기 위해 국익과 정치발전과는 거리가 먼 정략적인 개편을 시도했으나 한결같이 실패했음은 알려진 대로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의 김효석 의원에게 교육부총리 임명제의를 두고 열린 우리당과 민주당의 합당 포석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통령은 “합당과 무관하며 관여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고 여당도 “합당의사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지만 전당대회를 10일 앞둔 민주당은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로써 당파괴공작 미수사건”이라며 경계하고 있고 한나라당 등도 언제가는 시도할 것이 아니겠는가라며 예의주시하는 태도다.
 
야당이 경계·주시하는 것은 작년 노 대통령이 목포방문 중 양당의 합당을 비친데 이어 머지않아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여당의 원내과반수의석이 무너질 것에 대비하여 호남 끌어안기와 과반수선 확보를 위해 합당을 시도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합당을 내년의 지방선거, 2007년의 대선을 위한 포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난날 숱하게 시도됐던 정계개편이 거의가 실패, 무위로 돌아갔음을 들면서 필자는 노 대통령과 여당은 약속과 다짐대로 무리한 합당을 추진하지 말것을 권하고 싶다. 총선으로 이룩된 정국판도를 애써 바꾸는 것은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여당의 의석이 과반수가 미달되더라도 최대의석의 제1당인만큼 야당과 대화와 정치력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합당정계개편을 단행하려할 경우 충분한 시간을 두고 국민의 지지와 공감대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 아울러 민주주의 발전과 국리민복을 위하는 등 확고한 목적과 명분을 제시해야 한다. 정략적이고 무리한 개편은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성춘(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