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4월 박정희·김대중 두 후보가 치열하게 대결했던 대통령선거 때 체험했던 일이다.

 어느날 인천에서 김 후보의 유세가 끝나자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필자는 인근 다방의 전화를 빌려 본사데스크로 기사를 송고(送稿)했다. 그런데 김 후보가 공화당정부의 실정과 박 후보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대목을 부르는 도중 느닷없이 한 인물이 통화에 끼어들어 “야, 기사 이제 그만보내라고. 그렇게 독한 기사가 모두 신문에 보도될 수 있을 줄 알아…”하지 않는가.
 필자가 “당신 누군데 송고에 간섭하는 거야”라고 소리치자 그는 “내 얘기 듣는 게 좋을 것이야”하며 재빨리 빠졌다.

 어느 나라 건 국가보위와 안전을 위해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선진국의 경우 거의 적대국(敵對國)들, 주변국들의 각종 정보수집에 활동의 초점을 맞추는 데 비해 후진국들은 겉으로는 국가 안보 운운하지만 반대파 사찰·국민감시와 통제, 탄압 등 정권안보를 위해 악용하고 있다.
 1974년 초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FBI(미연방수사국)의 수사가 백악관 주변으로 좁혀오자 당황한 닉슨이 리차드·헬름스 CIA(중앙정보국) 국장에게 “연임을 보장할테니 CIA의 힘으로 FBI의 수사를 막아달라”고 했을 때 헬름스 국장은 “정보기관의 정치개입은 불법이다. 차라리 그만두겠다”고 응수했다.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져 오는 44살 경력의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초창기부터 한눈을 팔았다. 증권파동 등 4대 의혹사건을 주도했고, 공화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3공과 유신기간 동안 북한의 도발을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반면 안으로는 정치·언론·학원사찰과 도청·탄압으로 국민에게 '남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으스스 하게 하는 공포의 기관으로, 충실한 정권보위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10·26사건 후 신군부에 의해 철퇴를 맞는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관련 인사들을 솎아낸다는 개혁의 이름 아래 엉뚱하게 귀중한 해외·대공전문가들을 상당수 희생시키고 지역연고 친(親)권력 인사들로 대체해 힘을 약화시키면서 도청으로 권력자들의 환심을 샀다.

 대선 때 '안기부 폐지'를 공약했던 YS(김영삼 전대통령)는 집권 후 공약이행질문에 “안기부 필요하데이…”라고 했다는 소식이다. 라이벌인 DJ(김대중 총재)측의 동향을 도청으로 올린 보고로 들여다보는 재미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입만 열면 인권을 내세우며 절대 도청은 없을 것이라던 DJ도 재임 중 국정원이 내내 도청, 그것도 휴대폰까지 도청했다니 역시 이래저래 재미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YS나 DJ가 도청을 알았는가 몰랐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넌센스다.

 역대 대통령들과 국정원장들이 “도청은 절대 없다”고 거짓말하는 동안 불법도청한 테이프는 수천개가 쌓이고 관계자들은 훗날 한탕(?)하려고 무더기로 들고 나왔으니…. 아무려나 이들 모두는 한국을 도청공화국으로 만들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다. 당연히 현 노무현 정부의 도청여부도 조사·규명돼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도청사건 처리에 있어 엄정하고 명확하게 전모를 규명해야 하고 불법적 내용은 반드시 공개돼야 하며 해당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해야 하는 3대원칙을 강조하고자 한다.

 따라서 도청범죄의 전모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법적자격과 권한도 없는 각계원로들보다 대형특별검사팀을 운영해야 하고, 사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을 제외한 뇌물, 정경유착 등 불법적 거래는 모두 공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국정원은 특검의 도청수사가 일단락된 후 대대적인 개편·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불법적인 도청, 정보기관의 정권유지를 위한 도구화를 막는 장치·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