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하나인 에우리피데스가 지은 '메데이아'는 그리스 남자 이아손과 야만족의 딸 메데이아의 사랑과 배신, 그에 따른 잔인한 복수를 그린 작품이다. 두 아들을 낳은 남자의 변심에 대해 메데이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사회와 남자에 대한 가장 처절한 복수를 위해 두 아들을 죽인다는 내용이다. 이같은 내용의 '메데이아'는 당시 억압된 사회에 대한 복수를 그려낸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메데이아'처럼 부정적인 삶과 사회에 대한 복수로 자녀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올해만 무려 27명의 어린 목숨이 부모의 손에 죽어갔다. 물론 이같은 사건의 이면에는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신용불량자로 몰린 '신빈곤'이 문제다.

지난 19일 발생한 '남매 한강투기'사건에 앞서 4일에는 빚에 쪼들린 40대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음독 자살, 7월에는 인천에 30대 주부가 카드빚에 시달리다 세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등 어린 자녀들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귀한 생명을 잃었다. 단순히 불황이 낳은 가족의 비극으로, 철없는 부모들의 패륜으로만 치부하고 욕할 수만은 없는 사건이다. 대부분 빚에 쫓기거나 생활고에 못견딘 부모들이 '아이의 불행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최후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부모들을 '자녀살해'로 까지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궁핍하던 시대의 동반자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풍요로운 시대에 자녀를 살해하는 부모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열심히 일하면 먹고는 살수있고 부족한대로 영세민 대책도 마련돼 있는데 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가 하고 의문을 던져 보기도 한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경쟁과 소비, 강자와 일류만이 부각되는 세태, 약자에겐 돌파구가 안 보이는 절망, 눈부신 경제 발전에 가려진 빈곤의 대물림 등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마치 '메데이아'의 무대인 고대 그리스와 흡사하다.

많은 약자들은 이미 두려움과 절망으로 탈진해 있다. '일류'의 가치만이 강조되는 세상에서 많은 약자들은 자기상실감에 빠져있다. 자녀들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커녕 자신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도 못 느끼고 있다. 적극적으로 '죽고싶다'고 느끼지 않더라도 '살고 싶지 않다'거나 '왜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에 빠지고 있다. 자녀교육을 위해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도 불안이다. 끝모르게 치닫는 경쟁 아닌 경쟁, 일류 만들기의 압력,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부터 해방되려는 것이 교육이민의 목적이다.

모두가 불안에 떨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 곳은 병든 사회다. 병든 사회에서는 병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살벌한 세상에 사랑하는 아이들만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자녀를 죽이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일을 저지르기 까지 개인과 가족이 겪을 엄청난 고통을 우리 사회는 함께해야 한다. 핵가족 중심의 혈연주의가 지배하고 부모없이 남겨진 아이들이 자신의 핏줄 아닌 사회나 국가로 부터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있다는 확신이 없는 한 자녀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이러한 범죄행위는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박승용(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