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부평미군부대 앞을 지나는 출근길에 눈에 밟히는 광경이 있다. 1월 동장군의 위용에 기가 질린 것처럼 잔뜩 웅크린 채 방한복 두둑히 챙겨 입은 전경들이 부평미군부대의 주변 경비를 서는 모습은 안쓰럽기만 하다. 전세계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막강 미군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엄동설한과 맞서야 하니 말이다. 자유민주의 수호신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미군이 외곽경비를 한국 경찰에 의존하는 부평의 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화다. 더불어 하늘을 찌르는 미군의 자존심이 왠지 초라하기만 하다.
 
부평미군부대측이 우리 경찰에 경비를 의존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12월1일 이후다. 의정부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희생된 여중생들의 처참한 모습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청년 4명이 부평미군부대에 진입해 시위를 벌인 것. 당시 국민들의 반미 감정에 더듬이를 잔뜩 치켜 세웠던 경찰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경비 책임으로 심한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경찰은 이때부터 부평미군부대의 경비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평미군부대 인근 주민들의 시선은 곱지 못하다. 미군의 경비를 도맡은 경찰의 과잉친절을 공권력 낭비로 치부하는 주민들의 불만이 충분히 이유있다. 게다가 사시사철 목적없이 미군부대 외곽을 둘러싼채 경비를 도맡은 경찰의 저인망식 대응 자체도 전 근대적이다.
 
부평미군부대는 이지역 주민들에게 남다른 곳이다. 16만평에 이르는 부평미군부대는 단 10여명에 불과한 소수의 군인들이 주둔해 있는 상태. 이미 군부대의 주둔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도심 한복판의 금싸라기같은 땅을 미군들이 휴양지처럼 쓰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실의 모순을 참다 못한 주민들이 지난 1995년부터 부대 반환 운동을 벌였다. 심지어 한 시민단체는 지난 1999년 아예 부대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반환을 요구하며 약 2년동안 국내 최장기 철야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주민들의 반발이 갈수록 험악해지자 정부와 주한미군측은 결국 오는 2008년까지 부평미군부대의 이전을 확정했다.
 
부평미군부대는 굴절된 우리 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의 부평미군부대는 일제시대때 조병창으로 활용됐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치르기 위해 무기를 제작했던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론 미군이 부대를 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지역 주민들은 그동안 부평미군부대 때문에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주민들은 부대내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분진 피해에 시달려야 했고 도로를 내지 못해 부대를 우회하는 불편도 참아 왔다.
 
이런 배경을 감안하면 이전이 결정된 부평미군부대의 외곽 경비를 경찰이 수년동안 변함없이 계속하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경찰 내부에서도 부평미군부대 경비에 많은 경찰력을 낭비하는 구시대적 행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전해듣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변화와 혁신의 바람이 일고 있지만 부평미군부대 경비에 불필요한 공권력을 낭비하는 경찰의식의 후진성이 답답하기만 하다. 경찰은 주민들에게 공권력을 되돌려 줘야 한다. 편안하게 거주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주민들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수년째 부평미군부대를 지키는 경찰의 저자세가 허약한 대미 관계의 단면으로 비춰져 씁쓸하기만 하다. /이희동(인천본사 정경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