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푸에르토리코 국립미술관 입구엔 아주 특별한 그림이 걸려있다.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이다. 언뜻 보기에 3류 포르노 같은 그림이다. 딸 같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분명 부도덕하고 불결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내용을 알면 그 불결한 감정이 감동으로 와 닿는다.
 
가슴을 풀어 제친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그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투사였다. 노인은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음식물 투입 금지’라는 잔인한 형벌로 서서히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딸은 해산한 지 얼마 안 된 무거운 몸으로 아버지의 임종을 위해 감옥을 찾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딸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 앞에서 딸은 가슴을 풀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예서 뭐 다른 설명과 의미 부여가 필요할까.
 
3류 포르노와 명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본질에 대한 이해'이다. 똑같은 그림을 보면서 포르노로 볼 수 있고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로 감상 할 수도 있다. 본질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의 차이는 이렇게 엄청나다. 이는 인간다운 삶을 규정하는 삶의 질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그런 면에서 언론의 존재 양식은 인간의 존재 양식과 일치한다. 그래서 언론사는 사기업이라는 범주 보다는 공익기관으로 분류되는 것 아닌가. 언론에 있어 진실은 단순하지가 않다. 단순한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본질이 첨부되기 때문이다. 하여, 본질을 외면한 사실은 진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불행했던 시기에 우리나라의 언론은 자본과 권력에 휘둘려 본질을 외면했던 불쾌한 역사가 있다. 본질을 은폐하거나 왜곡한다면 이미 언론은 그 생명을 포기한 셈이다. 냄새나는 시체와 다를 바 없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이 시대 언론은 진실을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가.
 
최근 경기도지사와 국무총리와의 불협화음이 연일 지역일간지 1면을 장식한 적이 있다. 지난 5월 7일, 총리가 주재하는 수도권 발전대책 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촉발된 사안으로 차기 대권주자와 관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누가 봐도 본질은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정책과 수도권 규제로 말미암은 정책 간의 충돌이요 대립이건만 그간의 보도된 지면을 보면 손학규 지사와 이해찬 총리만 보였던 게 사실이다. 사실 정책에 대한 토론은 진부할 수도 있고 인기가 없을 수도 있다. 언론을 하나의 상품가치로만 본다면 정책의 비교와 토론보다는 차기 대권 주자들의 기세 싸움으로 의제화 하는 게 맞다.
 
지역민의 정서를 대변하고 지자체로부터 일정액의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지역언론사에게 있어 온전한 객관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도 그렇다. 적어도 기계적인 중립이라도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손 지사는 경기도의 발전과 고용 창출을 위해 정부와 투쟁을 불사하는 투사이고, 정부를 대신하는 이 총리는 수도권 주민의 삶을 위협하는 원흉으로 비쳐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더구나 이를 지방의 표를 의식한 정치논리로 폄훼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수치로 본다면 전국투표인수 50%를 육박하는 서울과 수도권 표를 잃고 있는 균형발전정책이 결코 유리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질을 외면,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다. 본질과 지역의 정서가 충돌하는 경우, 언론의 역할과 자리는 자명하다. 그게 자신 없다면 진실을 포기한 '찌라시’로 남는 수밖에 없다. /이주현(경기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