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이 바닥났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한 정부 재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필자가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시민단체의 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4년여 근근이 이어왔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바닥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허울 좋은 광역단위의 시민단체라는 우쭐함이랄까, 의욕이 앞서 일을 벌이는 바람에 지난 12월에 과다지출이 발생, 근근이 이어오던 재정이 드디어 한계를 드러낸 셈입니다.
재정이라고 하니까 뭐 대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고정 수입이 120여만원, 회원들이 매달 한 푼 두 푼 내주시는 회비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몇몇 단체의 후원과, 상근활동가들이 발제나 토론회 패널 등으로 참여하면서 받은 사례비를 합해야 최고일 경우 200여만원이 채 안되는 액수입니다. 흉내만 내는 두 사람의 상근 활동비를 제하면 사실, 남을 게 없는 액수지만 번듯한 사무실도 운영하고 행사 때는 대형화환도 받을 만큼 존재를 인정받는 단체로 성장을 했습니다. 혹자는 그런 사실을 도무지 믿질 못합니다. 지자체나 공익단체 등에서 엄청난(?)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상은 자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전국 최대 지자체인 1천만 경기도 지역의 언론을 감시하는 언론수용자단체 치고는 지나치게 왜소합니다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건 언론수용자나 언론사 모두에게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시민단체의 살림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스트레스가 되긴 합니다. 좀 쉬운 길을 택하고 싶은 유혹도 따릅니다. “이까짓 일 안하면 안 되나”하는 오기도 생깁니다. 그런 온갖 스트레스와 유혹과 오기를 물리칠 수 있는 건 순전히 ‘대의’입니다. ‘역사의 발전과 의식의 진전’이라는 대의는 움츠러드는 사지를 펴게 하는 신비한 동력이 되기도 하고 혼미한 사고를 명료하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한시라도 뒤처지면 안 되는 세계화 물결 속에서도 ‘칼바람 속 물대포’를 맞을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는 그런 ‘대의’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온 게 아닐까요.
반면에 역사를 퇴보시키는 건 아무래도 기회주의자들이 즐겨 써먹는 ‘대세’라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힘의 우열 속에서 강자의 편에 서는 겁니다. 대세 속엔 기득권이라는 세력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기에 안락함이 있습니다. 넘어져도 받쳐줄 든든한 배경이 있습니다. 하여 거기엔 스트레스가 없고 치열한 고민이 필요 없습니다. 물론,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시대정신을 애써 거스른 갈등 정도의 고통은 따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게 ‘대의’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에 있어서 최후의 승자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는 대의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최근 언론계에서 황우석 교수 보도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MBC PD 수첩과 YTN의 후속 보도는 대의를 따르는 자와 대세를 따르는 자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봅니다. 다행히 단시간에 진실이 밝혀져서 봉합은 되었습니다만 뒤는 개운치 않습니다. 돈 심부름까지 할 만큼 천박해진 저널리즘 때문입니다. 민주공화국의 기본적인 질서까지 파괴하려한 삼성 X-파일 파동은 어느새 '불법도청'이라는 의제로 변신, 수사 흉내만 내고 마쳤습니다. 사학법 개정은 사학의 정상화라는 의제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정치권 다툼으로, 국가의 정체성 논란으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는 막강한 자본과 정치권이라는 커다란 덩치들의 다툼을 대세로 판단한 언론 보도의 영향이 큽니다. 그런 면에서 언론들도 대의보다는 대세를 따른 셈입니다. 그동안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대의보다는 수도권 사수에 매달린 지역 언론들의 태도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나저나 고민입니다. 바닥난 재정 말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노심초사는 되지만 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대의를 버리고 대세를 따르진 않겠습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그 대의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대의 때문입니다.
/이 주 현(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대의와 대세, 그 갈림길에서
입력 2006-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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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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