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 우리 사회는 미성년자들이 직접 제작한 청소년 음란 비디오 '빨간 마후라'가 유명 연예인의 음란동영상과 함께 인터넷에서 보급되어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사실이 있다. 청소년들의 잘못된 이성관이 낳은 빨간 마후라는 성(性)이 사랑과 결혼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쾌락만으로 가능하다는 기성세대의 풍토를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이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기성인들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보여지는데 우리사회는 한낱 철없는 청소년 문제로 결부시켜 버렸다.
 
이 청소년들에 대해 차가운 질책이 뒤를 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아이러니 하게도 음란비디오에 대한 관심은 뜨겁게 달아올라 급속도로 확산됐다. 영상대중매체에 대한 청소년 유해환경 규제책이 없어 당국에서도 속수무책이었으나 1961년 12월13일 미성년자의 건전한 보호·육성을 목적으로 제정된 '미성년자보호법'을 폐지하고 대신 1999년 2월5일 '청소년보호법'을 제정했다. 청소년보호법이 증진되면서 청소년 성 보호법의 기틀을 마련하여 청소년 성문화, 원조 교제 등 청소년의 성을 사거나 이를 알선하는 행위, 청소년을 이용하여 음란물을 제작·배포하는 행위 등 청소년 성폭력에 대하여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법률이 대폭적으로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한마디로 기성세대의 잘못에 대한 고찰 없이 무작정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일방통행을 강요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 '빨간 마후라'의 제작에 참여했던 남녀 학생들은 다름아닌 사회 고위층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러한 상황은 해외 유학파, 오렌지족에 이어 IMF 위기를 겪고 있던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특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속칭 '비행 청소년'으로 불리던 그들이 그들의 이름에 걸맞게 공군(空軍)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셀프카메라 앞에 설 정도로 나름대로 재치있는 발상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비디오를 찍었던 그들은 지금쯤 20대 중반이 되어 있으리라 짐작된다. 어쩌면 그들 역시 사회 일원으로서 누구보다도 다양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비디오의 주인공에서 사회의 주역이 되기까지 불과 몇 년 동안 가족 문화의 지형이 많이 변했고, 이성·혼인·출산 등의 문제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사랑은 없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유행어가 생길 만큼 결혼과 별개로 사랑에 관한 사고관은 언제든지 마음먹기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결혼을 했더라도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부부가 늘어남으로써 이혼율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계적으로 세 번째로 손꼽힐 정도로 높아졌다. 유행어에 담긴 의미와 이혼율에 대한 통계만 보더라도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 아니며 결혼의 끝은 이혼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이혼은 인간성과 가족애를 상실한 가치관의 혼란이나 물질주의와 대중적 소비문화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국민들의 정서의 변화를 말한다고는 전적으로 단정짓기 어렵다.
 
필자는 도미노 게임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이혼은 그 동안 만연하게 남성위주로 편중된 제도가 상대적으로 여성들로 하여금 많은 제약을 주었고 특히 유교사상과 함께 여성 금기로 여겨졌던 이혼은 팽배했던 유교관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일시적인 사회 현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은 이혼이라는 부모의 싸움에서 자녀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족이 파괴되고 있고, 아이들은 무작정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소년 보호라는 취지의 법들은 오히려 은밀한 곳에서 또 다른 '빨간 마후라'를 제작하는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권성훈(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