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외설, 어디까지 벗고 입는가
입력 2005-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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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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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도시는 ‘벗기기'와 '벗기' 증후군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서 시대는 예술인들로 하여금 더욱 흥미롭고 자극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인디밴드 그룹이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춤을 추다가 옷을 벗고 성기를 노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에서 퍼포먼스로 알몸에 성기까지 노출시킨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지 용납될 수 없다.
필자는 공중파 방송에서 물의를 일으킨 이들의 음란성과 퇴폐성 문제 이전에 도덕적으로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무분별한 예술인들의 '예술과 외설'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사실 10여년 전만해도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뚜렷했다. 당시 예술과 외설의 시비로 도마 위에 오른 연세대 마광수교수의 장편 소설 '즐거운 사라'가 그것이다. 마교수는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화 되면서 직장을 해직당하고 법정에 서는 수모를 겪었지만 현실은 판매금지를 당한 '즐거운 사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마교수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켜면 키스신과 침실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심야 방송에서는 특정 부위만 가린 채 정사장면을 그대로 방영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저작들은 외설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싱겁고 밋밋한 평면적인 연애 소설이 되었다.
현대 문학사에 있어 '즐거운 사라'는 그저 예술이라는 표현의 자유에 법의 잣대를 들이댄 고전적 사건으로 평가될 만큼 예술과 외설을 바라보는 시각이 진보하였다. 미디어와 인터넷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많은 흥미와 자극을 불러 일으켰고 이에 부응하기 위하여 예술과 외설은 벗고 입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애매'하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모호'하다는 것은 다의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애매모호란 분명하지 못하고 희미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예술과 외설은 시간이 갈수록 그 경계도 사라지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다의적이다.
예술과 외설의 출발은 공통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동을 주는데 있다. 구분하자면 예술은 실리를 떠나 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순수한 창작을 의도하는 반면 외설은 상업성을 갖고 육체적인 것을 바탕으로 성욕을 자극하는 상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외설은 천시되어 왔고 예술의 공격적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육체는 정신을 담고 있고 정신은 육체를 움직이기 때문에 원래 예술과 외설의 경계지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예술이 외설일 수도 있고 외설이 예술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적대적 관계에 있던 예술과 외설은 조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대부분 예술은 자본이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예술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예술적인 것을 위하여 옷을 벗었고 대중성을 확보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인들의 의식적 구조에 맞게 예술 안에 외설을, 외설 안에 예술을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여 포장하고 있는 것뿐이다. 따라서 예술은 인간적인 감동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변화하면서 흘러왔을 뿐, 예술에 외설이 첨가 되었다고 해서 그 본질은 훼손될 수 없다고 보여진다.
다만 이번 성기 노출 사건을 지켜보면서 대중적인 예술을 지향하는 예술인들이 상기해야 할 것은 예술을 위한 외설의 차용은 있을 수 있어도 상업적인 도구로 예술을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을 지키라는 것이다.
/ 권성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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