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종로3가에 장애인들이 시위를 한다고 전철이 오질 않네…. 많이 늦을 것 같아.”

몇 년 만에 만나기로 약속한 후배로부터 휴대폰 메시지가 왔다.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단식농성에 참여했던 작년 여름이 떠올랐다. 지하철 발산역의 리프트에서 장애인이 추락사 했었다.

그의 죽음 이후 장애인 이동권연대는 200㎏이 넘는 전동형 휠체어를 떠받치기에는 너무나 위험천만하기만한 리프트를 치우고, 안전한 엘리베이터를 서울 지하철에 설치하라고 요구했었다. 너무나 당연했던 그 요구를 위해서 장애인들은 버스에 올라타는 '투쟁'을 하고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는 '투쟁'을 해야했다. 오늘처럼 변함없이….

약속시간보다 1시간 정도 늦은 후배는 나름대로 화가 조금 났었나보다. 이해할 만한 친구이다 보니 “글쎄, 시위를 한다는 거야. 장애인들이…”라는 말만을 몇 번 반복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배고픈 퇴근길, 몇 십분 동안 발이 묶였을 서울시민들의 불편함, 그 때문에 치밀어 올랐을 화가 짐작이 됐다.

9시 뉴스를 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뉴스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발목을 묶는 투쟁은 지양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불평이 가득했을지 모른다. 지하철 노조의 파업을, 화물연대 노조의 파업을 보도하던 그 방식 그대로….

얼마 전 인권교육시간에 “평등이란 똑같이 나누어 갖는 것, 능력있는 사람부터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더 많은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했더니, 학생 하나가 “노력한 사람에게 더 많은 대가를 주어야 한다. 기준 없이 똑같이 주거나 누구에게 더 많이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불편함과 절실함의 차이에 대해 장황한 답변을 했었다.

“지금 이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은 장애인은 이 건물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올라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이 건물 자체가 장애인을 배제하는 구조라는 거예요. 엘리베이터가 편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절실하기 때문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죠. 제 말은 이 건물에 엘리베이터 한 대를 설치하라는 거예요. 화려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엘리베이터를 만들자거나 엘리베이터 두 대를 설치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엘리베이터 한 대, 누구나 이 건물에 들어올 권리로서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자는 것이죠.”

이미 출발선이 다른 사회. 80명은 가난하고 20명만이 부유하고 행복한 세상으로 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노력을 해서, 기획가 평등해서,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서 행복해지고 부유해지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상상 아니냐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동성애자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장애를 가진 혼혈 여성일지라도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조금만 불편한 정도의 세상이 된다면'하고 상상해 보자고도 했다. 이야기를 듣던 학생들은 모두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정말 죽을 맛이겠군요.”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것이 '세상을 멈추는 일'이 되더라도 세상을 멈추고라도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20명에게는 불편하고 황당한 일이지만 결국 80명이 함께 행복한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니겠냐고….

수원의 남문에서 북문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그 일상을, 집밖으로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 꿈인 누군가에게도 아무런 거리낌 없는 현실이 되도록 하자는 것은 결코 불편함 정도와 맞바꿀 수 없는 것이다. 약속시간에 조금 늦은 짜증, 따뜻한 안식처인 가정으로의 귀가를 늦추었을 그 불편, 그런 것은 전철을 멈추는 사람들의 절실함보다 99%쯤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1%의 불편을 덜어내는 것은 나에게 필요한 99%의 행복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역할을 국가가 해야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방기하는 국가를 다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99%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나의 1%의 불편이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세상을 살고 싶다./이 밝은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