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미도'
1971년 8월 23일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인천 시내버스를 타고 나타난 군인들이 군경 합동진압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수사당국은 처음에 이들이 '무장공비'라고 했다가 이튿날 '군 특수범들의 난동사건'으로 정정한다.

이들은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북파훈련을 받던 684부대 공작원. 오랫동안 사건의 진실이 묻혀 있다가 80년대 후반부터 간간이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며 어두운 역사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냈다.

24일 개봉 예정인 '실미도'(공동제작 한맥영화ㆍ시네마서비스)는 소설과 방송 다큐멘터리로 일면이 소개된 이 비극적 실화를 스크린으로 끌어낸 영화.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가공이지만 주변 정황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영화는 68년 1월 21일 '박정희의 목을 따러' 침투한 북한의 124군 부대가 청와대 인근 자하문까지 이르렀다가 경찰에 발각돼 교전 끝에 모두 전사하고 김신조만 삼청공원 뒷산에서 체포돼 기자회견을 벌이는 이야기와, 월북자의 아들인 주먹패 강인찬(설경구)이 결혼식장을 습격해 상대파 보스에게 칼을 꽂고 도망가다가 붙잡힌 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이야기를 교차편집한 화면으로 시작한다.

68년 4월 창설돼 684부대로 불린 실미도 부대의 탄생 배경과 부대원들의 출신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인찬과 비슷한 경로를 거쳐온 31명(김신조 부대와 똑같은 숫자)은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나"란 제안을 받고 실미도에 도착한다.

인찬을 비롯해 상필(정재영), 근재(강신일), 찬석(강성진), 원희(임원희), 원상(엄태웅), 민호(김강우) 등은 20여차례 북한 침투 경력을 지닌 부대장 최재현 준위(안성기), 조중사(허준호), 박중사(이정헌) 등의 조련을 거쳐 인간병기로 만들어진다.

'멋있게 싸우고 값있게 죽자', '신체는 차돌같이, 손발은 무기처럼' 등의 구호가 곳곳에 나붙은 실미도에서 부대원들은 기간병들의 1대1 감시 아래 구보, 수영, 잠수, 사격, 유격, 폭파 등의 훈련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날 밤, 부대원들은 김일성의 목만 따오면 어두웠던 과거를 모두 지우고 새 삶을 얻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고무보트에 몸을 싣고 평양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젓는다. 그러나 상부에서 긴급한 전화가 걸려와 작전은 취소되고 실미도로 되돌아와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낸다.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고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남북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자 당국은 부대의 해체와 부대원들의 제거를 명령한다. 수상한 기미를 눈치챈 부대원들은 기간병들을 쏘아죽이고 섬을 탈출, 버스를 탈취한 뒤 청와대로 향한다.

지난해 초 4년 만의 연출 복귀작 '공공의 적'으로 자신감을 얻은 강우석 감독은 필생의 역작을 남기려는 듯 82억원의 순수제작비를 들여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정재영 등 쟁쟁한 배우들과 6개월간의 강행군을 펼쳤다.

실제 사건이라는 부담감에다가 고인과 유족, 그리고 생존 관계자들에 대한 눈치 때문인지 강 감독은 예전 작품에서 보여준 기발한 상상력이나 세련된 기교, 그리고 톡톡 튀는 유머 등을 최대한 배제한 채 우직하게 정공법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절반의 성공에 그친 듯하다. 사실적인 훈련장면, 살아숨쉬는 듯한 캐릭터, 비장한 남성적 분위기, 역사의 상흔을 일깨워 현실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등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덕목들이다.

그러나 갈등구조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줄거리 전개가 단선적인데다가 후반부에 감정의 과잉이 엿보여 시대적 배경에 익숙지 않은 신세대 관객에게는 복고적 신파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91년작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이후 모처럼 현대사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 강 감독은 '살인의 추억'의 성공과 '이중간첩'의 실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상영시간 135분. 15세 이상 관람가.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