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는 춤이 단골 소재였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진 켈리나 탭 댄스의 달인 프레드 아스테어가 활약하던 194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70년대 말 디스코 열풍의 도화선이 된 '토요일 밤의 열기'나 80년대 전세계 극장가에 춤 바람을 일으킨 '플래시 댄스'와 '더티 댄싱' 등은 아직도 관객의 뇌리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러나 충무로에서는 춤이 홀대받아왔다. 카바레나 디스코텍 등을 잠깐씩 비춘 것 말고는 춤이 전면에 등장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인상적인 영화 속 춤 장면으로는 안성기와 심혜진이 '서울야곡'에 맞춰 탱고 춤을 춘 '박봉곤 가출사건', 이정진이 디스코 솜씨를 뽐낸 '해적, 디스코왕되다', 박한별과 송지효가 발레 동작을 맛보기로 선보인 '여고괴담3-여우계단' 등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국내 최초의 뮤지컬 영화를 표방한 안성기-소찬휘 주연의 '미스터 레이디'도 2002년 8월 크랭크인했다가 제작비가 모자라 촬영을 중단한 상태.

춤에 대한 일반인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흔히 사교춤이라고 불리는 모던댄스나 라틴댄스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부터 '댄스스포츠'란 이름으로 정식 경기종목에 지정됐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아주머니들의 춤바람과 제비족을 연상시키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4월 9일 개봉할 '바람의 전설'은 이같은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시선을 춤에 대한 환상과 세간의 평판으로 치환시켜 보여주고 있다. 한 춤꾼이 털어놓는 인생 이력과 경찰이 그에게 두고 있는 혐의는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거리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이야기는 형사 송연화(박솔미)가 경찰서장의 부인을 농락한 '제비족'(본인은 예술가로 자처) 박풍식(이성재)을 검거하기 위해 환자로 위장해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박풍식에게 돈을 뜯긴 피해자들이 그의 범행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직접 자백을 들으려는 것이다.

풍식은 처남이 경영하는 총판 대리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30대 남자.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 송만수(김수로)가 대리점 위층에 무도학원을 차리면서 춤을 접하게 된다. 만수의 사기행각으로 회사가 풍비박산 지경에 이르지만 춤의 매력에 반한 풍식은 진정한 춤의 세계를 배우기 위해 가정도 내팽개친 채 춤의 고수들을 찾아 전국을 누빈다.

구도 여행을 방불케 하는 5년간의 방랑 수련 끝에 풍식은 달인의 경지에 이르고 카바레를 순례하며 여자들을 만난다. 새로운 춤 상대를 만날 때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춤을 추었고 여자들은 행복해했다. 그러다보면 항상 마지막엔 손에 돈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풍식의 고백을 들은 연화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풍식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한다. 병원 옥상에서 풍식의 손을 붙잡고 첫 스텝을 내딛는 순간 연화의 몸에도 새로운 세상을 만난 희열이 전류처럼 흐른다.

'바람의 전설'은 싸이더스 전신인 우노필름의 기획이사, 영화향기 대표, 시네마서비스 제작이사 등을 거친 지미향씨와 '주유소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의 시나리오를 쓴 박정우 작가가 함께 설립한 필름매니아의 창립작이자 박정우 작가의 감독 데뷔작.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이 기획과 함께 투자ㆍ배급을 맡았다.

박정우 감독은 말이 되든지 말든지 간에 일단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코믹한 대사나 해프닝들을 덧붙이는 자신의 스타일을 버리고 기승전결의 드라마적 구성을 택했다.

충무로에서 손꼽히는 작가인 그가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원작소설(성석제의 '소설 쓰는 인간')을 각색해 데뷔하는 것부터가 의아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결국 이 때문에 극중 대사처럼 '하나를 얻는 대신 하나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는 풍식의 고백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교차되면서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고 있다. 피륙을 짜듯이 하나씩 새로운 에피소드를 차례로 겹쳐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관객에게 편안한 미소를 짓게 하는 반면 황당함을 느끼며 폭소를 터뜨리는 박정우 특유의 빛깔은 희미해졌다.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져 132분의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는 것도 박 감독이 드라마적 구성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성재는 안정된 표정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김수로는 분위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감초 역할을 해냈다.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내미는 박솔미도 농염한 매력을 내뿜고 있으나 표정과 대사에서는 아직도 신인 티를 벗지 못한 느낌.

줄거리나 배우들보다 가장 큰 볼거리는 바로 춤. 왈츠, 자이브, 룸바, 탱고, 퀵스텝, 차차차, 파소도블레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어깨를 들썩거리게 한다. 몇해 전 '쉘 위 댄스'가 일본에 춤 바람을 일으켰듯이 이 영화가 전국의 무도학원을 북적거리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