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검절약이 철저하게 생활화된 국민으로 우리는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를 종종 떠올린다. 그러나 ‘절약’하면 스코틀랜드 사람을 따를 민족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스칸디나비아 나라 사람도 근검절약 정신이 생활화되어 있기는 매일반이다. 즉, 우리가 말하는 유럽 사람들은 대체로 절약 정신이 생활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는 뜻이다.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가 독일 유아원에서 첫날 배우는 것이 먹을 만큼만 자기 식기에 음식을 담고, 자기가 담은 음식은 반드시 먹도록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독일 유학 시절, 하숙집이나 대학 기숙사 현관이 어두컴컴해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열쇠 구멍을 찾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센서 기술이 광범위하게 쓰이지 않아 현관에 들어서면 캄캄한 공간을 1~2m 지나 버튼을 눌러야만 비로소 주위가 밝아졌다. 그래서 가정집이나 공공건물의 현관이나 복도, 계단 등이 아무도 없는 저녁 시간에 훤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30여 년이 지난 후, 필자가 다시 찾은 그곳엔 현관과 복도에 작은 미등이 켜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 현관문의 열쇠 구멍 찾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이렇게 발전했음에도 그들은 자기가 사용하는 방이나 사무실을 잠시라도 비울 때면 반드시 전등을 끄고 나가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우리의 사정은 너무나 다르다. 실로 민망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우리 주변에선 밝은 낮 시간에도 불필요하게 켜져 있는 전등을 쉽사리 볼 수 있다. 몇 시간씩 아무도 없는 빈방에 전등이 훤하게 켜져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크고 작은 공공 기관이 마치 무슨 권위의 상징인 양 모든 전등을 켜놓은 걸 보면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이를 사회적 낭비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관심 속에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이것이 개인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몇 해 전 어느 시민 단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1년에 약 10조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가 매일 쓰는 전력 중에서 낭비되는 금액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며, 수돗물 낭비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그저 버리는’ 국가적 낭비 총액은 수십조 원에 달할 것이다. 이를 짧게는 지난 10년간 또는 좀 길게는 과거 50년간의 총액으로 계산해 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될 것이다. 국가 전체가 아니라 각 가정 또는 기업이나 교육 기관 단위로 생각해 봐도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닐 것이다.
너무 단순한 논리이지만 그간 우리가 낭비해 온 재정적 손실을 막고 그것을 자원화할 수 있다면 국가 재정에 또는 개인 자산 형성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절약이 생활화되어야 하는데, 그걸 실천하기 위해 우리에겐 치워 버려야 할 커다란 걸림돌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의식 속에 비교적 깊게 그리고 넓게 자리 잡고 있는 절약에 대한 오만스러운 편견이다. 절약이라는 용어 쓰기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회 풍조가 문제의 핵심이다. 절약이라는 단어를 속이 좁은, 그래서 소심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는 강하다. 그래서일까? 이른바 ‘통 큰 분’들은 소심한 사람이라고 폄하될까 봐 뇌물을 받아도 ‘차떼기’로 한다.
근래 이런저런 이유로 국제유가가 매일 사상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형태의 절약 조치가 광범위하게 취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절약이라는 단어를 폄하하고, 낭비를 하는 데 ‘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국가적 그리고 개인적 차원의 절약을 생활화하는 것만이 어려운 경제 상황을 돌파해 나가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이 성 낙(가천의과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