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는 정치인으로선 그 나라의 제1인자다. 따라서 그 자리는 최고 영광의 자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에만 젖을 수 없는 게 또한 그 자리다. 영광이 큰만큼 국정 책임이 무겁기 때문이다. 막중한 책무를 지자면 쉬운 일 보다 어려운 일이 훨씬 많게 마련이다. 당연히 깊은 고뇌가 따른다. 여기에 국가적 시련까지 곁들이면 고뇌는 배가 된다.
한국은 유달리 시련이 많았다. 동족끼리 피 흘린 전쟁을 치렀고, 국토가 분단된 아픔까지 겪고 있다. 암울한 독재정치의 터널을 수십년 헤맸다. 어렵사리 민주화 과정을 밟은 건 기껏해야 10여년이다. 제2의 국치(國恥)라던 IMF한파도 힘들게 견뎌내야 했다.
숱한 시련을 겪다 보니 최고 통치자 대통령의 책무도 한층 막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뇌도 깊었을 것이다. 특히 구태청산 개혁을 강력 추구해온 노무현 대통령의 고뇌는 역대 누구 보다도 깊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일까. 노 대통령은 유난히 괴로운 심정을 자주 토로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 “괴롭고 힘들다” “속시원한 대책이 솔직히 없다” “불안해 잠이 잘 안온다” 등등. 그 때마다 국민은 가슴이 내려앉으며, 일면 송구스럽기도 했다. “또 무슨 일이 터졌나, 국민이 너무 어렵고 과분한 걸 요구했나”하면서.
그런데 얼마 전에 또 “속이 아프다”고 토로했다. 국무회의에 장관 대신 차관이 많이 참석하는 것을 두고, “대통령 힘이 빠진 탓이다”고 언론이 쓸까봐, 걱정했다면서 그렇게 표현했다. “이 정부가 끝날 때까지 속앓이가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아마도 ‘국무위원 다잡기’ 및 ‘임기 말 레임덕’을 염두에 둔 발언이란 추측들이다. 다행히 직접 국민을 향한 불만이나 하소연은 아닌듯 싶다. 하지만 그러잖아도 국정 난제들이 쌓여 있는데, 그같은 심기로 무난히 풀어나갈 수 있을지 다소 불안한 생각도 든다.
사실 북한 핵 및 미사일 문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어려워지는 민생 등 해결을 기다리는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마음을 다잡고 온힘을 쏟아도 쉽지 않아 보이는 난제들이다. 하물며 불편한 심기로는 일이 더 꼬일 지도 모른다.
북한만 해도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를 심각한 긴장속에 몰아넣고 있다. 펄쩍 펄쩍 뛰는 미국과 일본 등을 다독이고, 분별 잃은 북한을 자제시키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다. 한·미 FTA는 또 어떤가. 자국의 입맛에만 맞추려는 미국을 설득하고, 우리의 실익을 찾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 적극 반대투쟁을 벌이는 많은 시민단체들을 이해시키기도 난감하다.
민생은 민생대로 어려워지고 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나날이 줄어든다. 최근 한 경제연구소는 “지난 해 창출된 괜찮은 일자리가 총 14만개로, 재작년 30만개의 절반에도 못미친다”고 보고했다. ‘이구백(20대 90%가 백수)’ ‘십장생(10대도 장차 백수 되는 걸 생각해야 한다)’ 등 신조어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만큼 취업이 어렵다는 얘기다. 또 그만큼 삶이 힘들다는 말도 된다.
경제가 어려우니 가계 빚 또한 늘 수밖에 없다. 지난 3월말 현재 가계빚이 무려 530조원에 육박,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구당 부채 규모는 3천349만원 꼴이라고 한다. 살기 어려우니 빚더미만 늘어간다.
이같은 난제들이 속앓이만으로 절로 풀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은 불안과 긴장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국민이 불안해 하면 풀릴 일도 잘 안풀릴 수 있다. 물론 어려운 나랏일을 하다보면 가끔은 역증이 날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이해되고, 또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가뜩이나 근심 많은 국민은 오로지 지도자만 바라보고 있다. 의연한 지도자의 모습을 바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박 건 영(논설실장)